"월급에 기대 사는 것도 리스크"...나이 40, 오늘 퇴사합니다

중앙일보

입력 2021.09.23 00:02

업데이트 2021.09.23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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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창간기획] 조기은퇴 꿈꾸는 MZ세대 

조기 재테크파

조기 재테크파

“대기업 타이틀이 삶을 보장해 주진 않더군요. 월급에 기대어 사는 리스크(위험)를 줄이기로 했죠.” 2년 전 회사를 관두고 조기 은퇴한 김도협(41)씨. 그가 대기업 명함을 포기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직장’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는 2008년 부산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뒤 STX조선해양에 입사했다. 취업만 하면 안정된 삶이 보장될 줄 알았다. 장밋빛 꿈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물거품이 됐다. 조선업 불황이 지속하며 구조조정이 이어졌다. 인력 조정 압박을 피해 2014년 SK케미칼로 이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맡은 신사업 성과가 부진하면서 부서가 해체 위기에 놓였다.

그는 “더는 내 삶을 남(회사)에게 맡겨선 안 되겠다 싶었다”며 “하루빨리 경제적으로 독립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조기 은퇴를 결심하고 5년 만에 종잣돈 4억원을 21억원으로 불린 뒤, 39세에 회사를 떠났다. 조기은퇴자, 파이어(FIRE)족이 됐다.

김다현(40)씨는 지난해 9월 카카오를 그만뒀다. 이로써 1년 먼저 은퇴한 남편과 함께 이들 부부는 마흔 전에 ‘파이어족’이 됐다. 이들은 많은 돈을 모은 뒤 은퇴하는 방법 대신 열심히 일하고 덜 쓰는 방식을 택했다. 은퇴를 위해 5억원을 모으기로 목표를 정한 뒤 소득의 70% 이상을 저축했다. 55세부터 개인연금과 퇴직연금으로 10년, 이후에는 국민연금과 주택연금으로 노후를 꾸려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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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도 파이어족이 상륙했다. 취업준비자가 역대 최대를 기록하는 와중에 나타난 파이어족은 ‘경제적 독립, 조기 은퇴(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의 앞글자를 딴 용어로 40대 초반 전후에 은퇴를 꿈꾸는 이를 뜻한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미국의 젊은 고학력·고소득 계층으로 퍼졌다.

파이어족은 헤어날 수 없는 학자금 대출과 불안한 취업 전망, 무너져가는 세상, 연금의 한계 등에 갇힌 ‘밀레니얼 세대 우울증’의 발로였다. MZ세대를 중심으로 파이어족이 늘어나는 한국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취업난에 자본 소득에 비해 뒤처지는 노동 가치, 불안정해지는 고용과 길어진 수명 등이 조기 은퇴를 부추기고 있다.

돈보다 내가 주도하는 삶에 대한 갈망도 이유다. 삼성전자와 현대카드 등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 3년 전 파이어족 대열에 합류한 여신욱(39)씨는 “회사 업무는 만족스러웠지만 인생을 재설계하고 싶다는 욕구가 컸다”고 말했다.

조기 은퇴를 선택한 MZ세대의 무기는 금융 상식이다. 김진웅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수석전문위원은 “국내 파이어족은 소비 축소보다는 투자를 통해 부를 쌓는 부분에 비중을 더 둔다”고 지적했다.

“금융지식 갖춘 MZ세대, 월급만으로 부 쌓기 힘들자 투자로 눈 돌려”

안분지족(安分知足)파

안분지족(安分知足)파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금융 지식을 갖고 투자 역량을 갖춘 MZ세대는 직장 상사 밑에서 힘들게 일할 바에야 투자를 통해 돈을 벌어 파이어족이 될 확률이 높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어렵게 취업 관문을 뚫은 MZ세대가 퇴사를 서두르는 데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게 전문가의 공통된 의견이다. 평생직장이란 개념이 희미해진 데다 60세까지 정년이 보장된다고 해도 ‘100세 시대’를 고려하면 노후 준비가 막막하기 때문이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정규직이 점점 사라지고 대기업도 직원을 거의 뽑지 않으면서 20·30세대가 실질적으로 노후 설계를 할 수 없는 사회가 됐다”며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더라도 주식이나 부동산, 암호화폐 투자로 자산을 많이 모은 경우를 보면서 노동소득보다 자본소득을 불리는 데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들의 불안감에 불을 댕긴 건 자산 가격의 급등이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지난 6월 연 소득 대비 서울 집값 비율(PIR)은 18.5로 나타났다. 역대 최고치다. 서울에 사는 중위소득(소득 순으로 중간 가구의 소득) 가구가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8년6개월을 모아야만 주택을 살 수 있다는 의미다. 지난 17일 기준 코스피 지수는 1년 사이 30% 뛰었다.

반면에 근로소득은 제자리걸음이다. 근로자 임금 실수령액(사회보험료와 근로소득세 제외)은 2010년 357만원에서 지난해 435만원으로 연평균 2% 증가하는 데 그쳤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최근 10년간 300인 이상 기업의 월 평균임금 통계를 분석한 결과다. 월급만 모아서는 부(富)를 쌓을 수 없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는 얘기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급격히 치솟는 집값에 박탈감과 불안감이 느끼는 젊은 층이 늘고 있다”며 “노동가치가 낮은 회삿일보다 투자로 돈을 불리는 일에 집중한다”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직장을 자기 계발이나 성취감을 찾기보다 단순히 돈을 버는 곳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커지다 보니 ‘임포자’(임원을 포기한 사람)를 넘어 조기 은퇴를 꿈꾸는 파이어족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파이어족의 등장이 드러내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컸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고 국가적인 차원의 산업 정책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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