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많아야만 은퇴하나요? 내 삶을 사는 게 중요하죠”

중앙일보

입력 2021.09.23 00:02

업데이트 2021.09.23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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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창간기획] 조기은퇴 꿈꾸는 MZ세대 

각자도생의 시대, MZ세대 사이에 ‘파이어(FIRE)’ 바람이 불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등장한 파이어는 ‘경제적 독립, 빠른 은퇴(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를 뜻하는 말이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은퇴를 꿈꾸는 이들은 미래를 위해 현재 욕구를 최대한 자제한다. 그 형태도 다양하다. 4인4색 파이어족을 만났다.

조기 재테크파 

조기 재테크파

조기 재테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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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벌어 조기 은퇴하는 파이어(FIRE)족이 되기 위한 기본 전제는 ‘경제적 독립’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월급을 대체할 현금 파이프라인을 만드는 것이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저축을 통해 은퇴 자산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은퇴 시기를 앞당길 수도 있다.

2년 전 SK케미칼을 관두고 파이어족이 된 김도협(41)씨가 그렇다. 지난 3일 제주도 구좌읍에서 만난 김씨는 “대기업이라도 평생직장을 보장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해 월급이 아닌 ‘자산 파이프라인 구축’으로 목표를 변경했다”고 말했다.

조기 은퇴를 결심한 김씨가 ‘16억 모으기 목표’를 세웠다. 세 명의 가족이 1년에 평균 4000만원을 쓰는 걸 고려해 대략 40년간 생활비를 따져보니 16억원 정도가 나와서다. 5년 만에 종잣돈 4억원을 21억원으로 불리며 당초 목표보다 1년 이른 2019년에 퇴사했다.

자산을 불린 주요 비결은 부동산 투자였다. 그는 “2016년부터 서울 아파트값이 들썩이자 집값이 덜 오른 수도권 신도시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특히 GTX 이슈를 보고 투자한 경기도 파주 운정의 아파트 2채 투자로 3년 새 10억원을 벌었다. 2019년부터는 당시 집값이 크게 하락한 부산 아파트에 투자해 자산을 불렸다.

실전에 뛰어들기 전까지 2년간 부동산 공부에 매진했다. 매일 오전 6시30분 회사 도서관으로 출근해 2시간씩 부동산 관련 책을 읽는 등 공부하고 주말이면 ‘임장(부동산 현장 답사)’을 다녔다.

이렇게 투자해 그는 아파트 월세와 주식 투자 등에 따른 배당금, 부동산 관련 강연과 유튜브 활동 등으로 부수입을 올리며 현금흐름(파이프라인)을 확보하고 있다.

노무라와 씨티, 한국투자 등 국내외 증권사에서 10년간 주식 애널리스트를 하다 조기 은퇴한 이고은(39)씨도 주식과 부동산 투자로 조기 은퇴를 위한 자산을 마련했다. 이씨는 “애널리스트를 천직으로 생각했지만 노동가치가 낮아졌다는 생각이 든 데다 특정 섹터만 분석하는 게 싫어져 조기 은퇴를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씨는 “배당주나 월세 등 투자금 대비 현금흐름이 큰 자산 투자에 집중했다”며 “투자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이 아닌 황금알(현금흐름)을 낳는 거위(자산)를 사서 키우는 것과 같다”고 강조했다. 갭투자로 전세 레버리지를 사용하거나, 해외 기업 중에서 ‘배당 귀족주’에 투자해 수익률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을 추천했다.

파이어족이 된 뒤 가장 좋은 점을 묻자 김씨와 이씨 모두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답했다. 이씨는 “생각의 지평이 넓어졌다”며 “직장인에서 벗어나 투자자와 창업가의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먼저 길을 나선 파이어족으로서 조기 은퇴를 꿈꾸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이씨는 “직장에 다니는 것도 자신의 시간을 통해 월급을 받는 일종의 투자”라며 “자신이 투자자임을 인식하고 감당할 수 있는 소액으로 투자를 시작해 경험을 쌓아 보라”고 했다.

김씨는 “파이어족이 되는 건 단순히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사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조기은퇴 꿈꾸는 MZ세대 엿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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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분지족(安分知足)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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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부자 말고 ‘시간 부자’ 하려고요.”

지난해 9월 카카오를 관두고 ‘파이어(FIRE)족’ 선언을 한 김다현(40)씨는 조기 은퇴의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5년 만에 조기 은퇴한 남편은 김씨보다 1년 먼저 은퇴했다. 부부 모두 마흔 직전에 은퇴한 것이다.

이들 부부의 선택은 돈이 많아야만 조기 은퇴를 할 수 있다는 통념에 반한다. 이들 부부가 은퇴를 위해 모으기로 목표한 돈은 5억원이었다. 부부가 설정한 한 달 생활비는 250만원. 두 사람이 납입한 연금 수령 전까지 15년 남짓한 기간 동안 매년 3000만원씩 약 4억5000만원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부부는 합산 소득의 70% 이상을 무조건 저축했다. 퇴직금은 세금 감면을 위해 일시금이 아닌 퇴직연금으로 받았다. 목표를 세운 뒤 5년 만에 2억원 남짓 현금을 모았다. 목표액 중 부족한 부분은 지방으로 이사해 집 규모를 줄여 보충할 계획이다. 55세 이후는 개인연금과 퇴직연금으로 10년을 살고, 그 이후에는 국민연금과 주택연금으로 노후를 꾸릴 계획이다.

파이어족이 되기 위해 이들은 실거주 목적을 위한 집을 산 것 외에는 별다른 재테크를 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고 덜 쓰는 방식을 택했다. 김씨는 “파이어족이라고 회사 일을 대충 할 것 같다는 편견이 있지만 정말 ‘빡세게’ 일했다”며 “연봉을 20% 올린 적도 있다”고 했다.

스노보드와 낚시, 골프 등 ‘취미 부자’였던 남편은 도보 여행과 같은 돈이 들지 않는 새로운 취미를 찾았다. 김씨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데 그렇게 큰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용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36세에 파이어족인 된 여신욱(39)씨도 ‘내 시간’을 사용하기 위해 조기 은퇴를 택했다. 삼성전자와 현대카드, SAP 등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했던 여씨는 “회사 업무는 만족스러웠지만 야근 등으로 몸이 상하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부족해 인생을 리디자인(재설계)하고 싶다는 욕구가 컸다”고 말했다. 여씨는 “연봉과 커리어를 포기한 대신 건강과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을 찾았다”고 덧붙였다.

조기 은퇴를 위해 마련한 돈은 4억원. 여씨는 “수십억원의 노후 생활비를 모두 마련한 뒤 은퇴하겠다고 생각했다면 시도조차 못 했을 것”이라며 “주식 투자로 연봉만큼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처럼 주거비를 줄이는 ‘지리적 차익’을 누리기 위해 경기도 판교에서 제주도로 이사를 했다.

주식 투자 등으로 은퇴자금을 조달하는 상황에서 아찔한 경험도 있었다. 코로나19 여파로 지난해 보유했던 조선업 종목 주가가 급락하며 전체 운용 손실률이 -40%까지 떨어졌다. 여씨는 “외부적 충격에 의한 하락인 만큼 주가 회복까지 버티기로 하면서 전공(시각디자인)을 살려 제주도 내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는 등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여씨는 파이어족은 “해보고 싶은 도전이나 삶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파이어족을 꿈꾸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재테크나 현금 파이프라인 구축이 파이어족의 핵심이 아니다. 돈 버는 방법만 쫓다 보면 회사 노예에서 재테크의 노예로 주인만 바뀔 뿐이다. 남의 기준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삶을 개척하겠다는 ‘의지’가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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