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박한슬이 저격한다

D.P. 보고 모병제 꺼낸 홍준표님, 가난한 청년만 군대 갑니까

중앙일보

입력 2021.09.23 00:01

박한슬 약사 출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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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후보님, 대선 경선 일정으로 바쁘신 와중에도 넷플릭스 드라마 'D.P.'를 봤다고 말씀하신 걸 들었습니다. 드라마가 퍽 감명 깊으셨던지 “청년들을 징병의 멍에로부터 풀어줄 때가 됐다”며 모병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셨죠. 제 나이 이제 서른 안팎이다 보니 해병대 나온 동생이 말하는 "건빵 한 봉지를 10분 이내에 먹어야만 했다"는 경험이라든지, 또 다른 친구가 "괴롭힘을 당하다 목을 매 자살한 동기의 얼굴을 마주했던 고통이 너무 크다"며 충격을 털어놓는 말 등 이런저런 군대 얘기를 듣게 됩니다. 직접 경험이 아닌데도 D.P.가 마냥 현실에서는 없는 드라마 속 이야기라 치부할 수 없단 걸 알 수밖에 없죠. 과장됐을지라도 실재하는 비극임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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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기준, 대한민국 청년 남성의 징집률은 91%입니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의 징병률 90%를 웃도는 무척 높은 수치지요. 현역으로는 복무하기 곤란해 사회복무를 진행하는 이들을 합하면 94%가 넘으니, 군에 가지 말았어야 할 사람도 대부분 군에 끌려가는 게 현재 한국 청년들의 현실입니다. 최근엔 이마저도 부족한지 석·박사 학위를 받고 산업체와 연구소에서 대체복무하는 전문연구요원 숫자까지 축소했습니다. 또 올해부터는 고졸 미만의 학력을 가진 이들도 보충역이 아닌 현역으로 복무하게 되었습니다. 

D.P.의 대책이 모병제? 

복잡한 국방전략에 대한 이해는 솔직히 없습니다. 다만, 현재 수준의 병력 규모를 앞으로 계속 유지하지 못한다는 건 인구학적으로만 봐도 자명한 일입니다. 2017년 남아 출생아 수는 18만 명을 조금 넘습니다. 20년 지난 2037년에는 징병률 100%를 유지해도 현재의 20만 명 규모 병력을 유지할 수가 없다는 뜻이지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대안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병력 규모 자체를 축소하는 것도 그중 한 가지이고, 부족한 병역자원 벌충을 위해 남녀 균등 징병도 얘기되고 있습니다. 홍준표 후보님이 주장하는 모병제도 대안 중 하나일 겁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D.P.’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D.P.’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병력 규모의 합리적 조정 차원이라면 모를까, 드라마 D.P.가 보여준 군내 가혹 행위 방지책으로 모병제가 등장하는 건 저로선 도무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현재 한국 사회의 여러 부조리를 근거로 볼 때 모병제는 이러한 가혹 행위를 더 끔찍하게 가속할 여지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사람만 군문을 밟는다는 모병제는 겉으로 보기엔 합리적이기 그지없습니다. 미국 같은 선진국도 그런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니 홍보에도 제격이겠지요. 그렇지만 실제 미국군 복무 현실을 검토해보면 상황이 그리 이상적이지 않습니다. 모병제는 원하는 사람만 가는 곳이 아니라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는 미군이 받는 다양한 학비 지원과 혜택만 강조되지만, 따져보면 그 돈은 군에 가지 않는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세금입니다. 부유층은 돈을 내는 대신 군역을 면제받는다고 하면 아마 많은 이들이 반발하겠죠. 그러니 원하는 사람만 입대한다는 모병제란 포장지로 이런 현실을 은폐하는 거 아닙니까. 수치가 입증합니다. 

가난하면 전쟁서도 더 많이 죽는다 

미군에서 인구비율 대비 가장 많이 입대하는 인종은 흑인입니다. 당장 학비와 일자리가 더 시급해서 하는 선택이죠. 심지어 그중에서도 가난한 집단은 더 위험한 전장에 배치되고, 더 많이 죽기까지 합니다. 모병제 이후 치러진 첫 대규모 전쟁인 이라크 전쟁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높은 사망률을 보인 장병들의 출신 지역과 상대적으로 낮은 사망률을 보인 장병들의 출신 지역을 비교하니, 평균 가구소득이 1만 2000달러 넘게 차이가 났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비교했을 때, 징병제가 유지되던 한국전쟁에서는 그 차이가 6000달러에 불과했었습니다. 모병제를 진행하니 그 차이가 무려 2배나 불어난 것입니다. 같은 군 내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이 죽어 나갔던 겁니다. 

군에 대한 사회적 예우와 존경이 뛰어난 미국에서도 모병제의 현실이 이러한데, 군인이 고등학생에 집단 구타당하고도 반격을 하지 못하는 국가에서 모병제가 가능하다고 믿는 후보자님의 현실 인식은 아득하게만 느껴집니다. 

홍준표 후보님, 혹시 ‘기울어진 연병장’이라는 얘기를 들어보셨습니까? 흔히 한쪽에 유리한 지형에서 싸움을 벌인다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표현을 비꼬아 우리 또래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입니다. 군 복무 과정에서 겪은 부당함과 부조리의 개선을 요구하는 이들을 ‘군무새’라며 조롱하고, TV 유머프로그램에서는 6·25 참전용사를 등장시켜 모욕을 주는 게 요즘 세태입니다. 군 복무를 마친 장병은 그때부터 사회적으로 불리하다고 믿는 게 청년 남성들의 현실 인식입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본인의 당 대표 시절 장남이 군복무를 하며 특혜 휴가를 받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또 늑장 수사, 부실 수사 비판도 상당했다. 뉴스1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본인의 당 대표 시절 장남이 군복무를 하며 특혜 휴가를 받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또 늑장 수사, 부실 수사 비판도 상당했다. 뉴스1

특권층 다 빠진 군대의 모습 

우리는 법무부 장관이라는 힘 있는 사람의 아들이 휴가 후 무단으로 미복귀하고도 원격으로 휴가 연장신청을 해 탈영이 아니게 만들어주는 걸 이미 목격했습니다. 화 나는 일이긴 하지만 이런 권력자도, 그리고 입시 서류를 위조해 무자격 자녀를 기어이 의전원에 꽂아 의사를 만들겠다고 파렴치한 편법을 쓰는 고위 공직자의 자녀도 역시 군대에 가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입대하면 상대적으로 편한 보직으로 쉽게 군역을 마친다는 비판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만약 이런 특권층이 처음부터 다 빠지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만 군대에 모아두면 한국 사회가 군의 생활환경에 얼마나 관심을 보이겠습니까? 

최근 홍 후보자께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가 학계의 지위와 상류층 인적 네트워크를 이용해 벌인 편법 행위에 대한 수사가 과잉이었다는 주장을 펴는 걸 봤습니다. 학창시절 배가 고프면 수돗물로 배를 채웠다던 홍 후보께서는 어쩌면 사회가 가난을 대하는 태도마저 잊을 정도로 지나치게 성공하신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문제라고 보지 못할 정도로 그 계층에 동화되셨으니 한국 사회가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리신 것이겠지요. 어쩌면 나라를 지키고도 제대로 된 보상이 없다는 분노를 그저 어린애들이 군대 가기 싫다는 투정으로 이해하고 계신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홍 후보님. 군 가혹 행위를 막기 위해 몇 년 전부터 다양한 제도가 꾸준히 도입되고 있고 여러 대안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진짜로 청년들이 군에서 겪는 가혹 행위를 없애길 바라신다면, 유력 대선 후보 중 한 분으로서 모병제라는 어설픈 사탕발림 대신 이런 제도와 대안을 공부하셔서 바른 해법을 내놔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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