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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엘리가 저격한다

김수현 교수님, 집값 올라 청소년쉼터 사라진 건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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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프리랜서 크리에이터
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실장. 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의 입안자다.

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실장. 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의 입안자다.

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실장님께.
저는 서울 강북구 주민입니다. 찾아보니 현재 세종대 대학원에 재직 중이시길래 그냥 편하게 교수님이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직함 중 왜 하필 교수냐고요? ‘전 청와대 정책실장님’이라고 하니 뭔가 엄청난 심리적 거리감이 느껴져서요. 저 같은 일개 ‘글’로생활자가 이렇게 높은 분께 어떻게 미주알고주알 따지고 들겠습니까. 하지만 교수님이라고 부르니 뉘앙스가 살짝 달라지더군요. 궁금한 게 생겼을 때 교수 연구실 문을 똑똑, 노크하고 들어가서 묻는 느낌이랄까요. 상대적으로 좀 덜 쫄게 되더라고요. 어쨌거나 흰소리는 이쯤에서 그만두고 질문을 좀 드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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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첫머리에 강북 구민이라고 굳이 밝힌 이유를 좀 말씀드릴까 합니다. 사실 저는 몇 년 전까지 강남구민이었답니다. 뭣 하러 수고롭게 한강 북쪽으로 이사했느냐고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은 전셋값 때문이었습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처음부터 자가로 살지 누가 전세로 아파트 살라고 그랬냐?"라며 남의 속 뒤집어지는 소리를 하진 않으시겠죠? 누군들 처음부터 자가로 서울에 아파트 한 채 마련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것도 똘똘한 한 채가 즐비한 강남 노른자 땅에 말이죠.

이제 와 집 안 산 걸 후회한들 

뭐, 이제 와 후회한들 뭐 어쩌겠습니까? 부동산값이 이리 천정부지 오를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미리 알았더라면 지금 도서관에 앉아 이런 글을 쓸 일도 없었을 테지요. 배고픈 프리랜서가 되기 전에 제1, 제2, 아니 제N 금융권 대출을 싹 당겨서 주택 사재기라도 했다면 지금 이런 글을 쓰는 대신 용한 술사로 끗발 좀 날리며 높으신 분들한테 부동산 투자 관련 ‘동양식(샤머니즘식) 컨설팅’ 하면서 요샛말로 ‘인생 개꿀’로 살고 있겠네요.
농담이 아닙니다. 지난 4년간 서울 아파트 가격은 평균 8억8000만 원, 강남구 전셋값은 40%가 올랐더군요. 저처럼 수입이 변변찮은 '글로' 노동자가 괜찮은 서울 아파트를 사려면 (평균 임금 기준) 118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두 저축해야 가능한 금액입니다. 한국인의 기대 수명이 83.3세고 제가 30대 초니까 여기서 제 나이를 빼면…. 와, 이건 다음 생에도 어렵겠는데요? 지금부터 118년을 모아야 하는 거라니 저는 다음 생도 아닌, 다다음 생에도 강남구에 아파트 하나 장만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안녕, 강남구. 다다음 생에나 다시 볼 수 있으면 보자….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징징대는 소리를 좀 냈지만, 그래도 저는 괜찮은 축에 속합니다. 북쪽이든 남쪽이든, 제 한 몸 누울 공간은 있으니까요. 그럼 도대체 왜 이런 얘기를 늘어놓고 있냐고요? 그건 얼마 전 들은 소식 때문입니다. 전셋값이 치솟는 바람에 24년간 운영했던 강남청소년쉼터가 문을 닫게 되었다는 뉴스였습니다. 이 기사를 읽으며 저는 문득 2년 전 처음 만났던 안모 양이 떠올랐습니다. 올해 대학에 갔지만 당시엔 미성년자였던 안 양은 제가 주관한 여성 취미 글쓰기 모임에 참여했던 학생으로, 가정 폭력을 피해 금천에 있는 청소년쉼터에 머물고 있었죠.
혹시 교수님께서는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쉼터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고 계시나요? 청소년, 특히 여성 청소년이 학대 등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집을 나오게 되면 너무나 쉽게 범죄 사각지대에 놓이게 됩니다. 당장 지낼 곳도, 돈도, 기댈 곳도 없는 청소년이 인터넷 검색창에서 ‘가출’이란 키워드만 검색해도 ‘고액 알바’‘만남 알바’ 등 못된 어른이 쳐 놓은 그물에 너무도 손쉽게 걸려들게 됩니다. 당시 A양의 말을 들어보니 쉼터에는 아무 이유 없이 가출한 이른바 불량청소년보다 자신처럼 가정 내의 물리적 폭력과 정신적 학대 등을 피해 도망쳐 나온 이들이 대다수였다고 합니다. 슬픈 현실이죠. 그래도 쉼터가 있었기에, 따로 지낼 곳을 구할 여력이 생길 동안 숙식을 해결하면서 학교도 다닐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가 이번에 문을 닫는 강남구청소년쉼터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지만, 기사를 본 순간 어쩔 수 없이 A양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 친구들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가혹한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동산 정책 실패가 ‘후려친’ 건 투기꾼이 아니라 저소득층, 특히 가출 청소년과 같은 사회 취약계층의 주거 생활이라는 것을요.

부동산 정책 실패가 빼앗은 청소년쉼터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부모를 잘 만나면 누구는 성년도 되기 전에 임대사업자가 되고 다른 누구는 생존을 겨우 이어갈 사회복지시설마저 없어져 당장 내년 1월 1일부터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처지라니요.

쉼터에서 세배를 배우는 청소년들. [사진 대전여자단기청소년쉼터]

쉼터에서 세배를 배우는 청소년들. [사진 대전여자단기청소년쉼터]

앞서 언급한 강남청년쉼터는 남자 청소년들을 보호하는 사회복지 시설이었습니다. 해마다 120여 명, 23년 동안 3000여 명에 달하는 남자 청소년들이 이곳을 거쳐 갔습니다. 그러나 올해로 복지 재단의 무상 임대 기간이 끝나 결국 영영 문을 닫게 됐습니다. 원래는 이사 갈 곳을 찾으려 했지만 옮길 곳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박건수 강남구청소년쉼터 소장의 언론 인터뷰를 보니, 강남구가 지원해준 예산 9억 원으로는 아무 데도 구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부동산값이 너무 올라버려 문의하는 것만으로도 "염치없다"는 욕을 먹는 수준이라는 겁니다. 적어도 15억 원은 있어야 지금 사용하는 165㎡(50평) 규모를 알아볼 수 있는 모양입니다. 이곳이 문을 닫고 나면 서울에는 남자 청소년을 위한 쉼터가 단 두 곳만 남게 됩니다. 과연 이 쉼터를 떠난 소년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다른 구 사회복지 시설로 온전히 이관된다면 좋겠지만 시설마다 수용할 수 있는 정원은 한정되어 있으니 쉽지 않아 보입니다.
교수님께서 최근 동아시아 국가들의 주택정책을 다룬 책 『집에 갇힌 나라, 동아시아와 중국』을 내셨더군요. 출간 인터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한국의 집값 상승률은 낮아도 평균적으로 다른 나라들보다 낮은 편"이라고 한 부분입니다. 그렇죠. 맞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집값이 출렁이고 있습니다. 저금리 기조에 코로나 19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한 경기 부양책의 목적으로 돈이 시중에 풀리다 보니 단기간에 급격히 올랐다는 공통점이 있죠. 국내 집값 상승은 비단 이 요인만이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이 분야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전문가들은 부동산정책 실패가 크다고 보고 있더군요.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교 교수는 "해외는 코로나 19 사태가 터진 후인 지난해 급등했지만 국내 집값은 그전부터 오르기 시작했고, 대도시 위주로 오른 다른 국가와 달리 국내는 전국적으로 올랐다"라며 지난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밀어붙인 임대차법이 전국 집값을 투기판으로 만든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쓴소리를 좀 했더군요. 문재인 정부 들어 부동산정책을 내놓은 분들의 잘못이 한국의 집값 상승률에 책임이 있다는 거죠. 이런 상황인데, "전 세계 집값이 다 올랐다, 그나마도 OECD 국가 중 한국은 하위에 속한다"며 다른 나라를 앞세워 변명만 하기엔 좀 민망하지 않으신가요? 아, 맞다. 인터뷰 끝자락에 "한국의 부동산 정책에 관한 생각을 본격적으로 밝히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뤄둔다"고 하셨죠. 그다음 ‘기회’는 언제인가요? 혹시 그 기회가 왔을 때, 그동안의 부동산 정책에서 사회 취약계층이 고려된 적이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을까요? 꼭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그다음 기회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