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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한슬이 저격한다

호통치다 간 은성수 위원장님, 오전 9시 화장실 왜 찰까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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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슬 약사 출신 작가

가상화폐(이하 코인) 투자로 낭패를 본 친구가 있다. 절대 실명을 밝히지 않기로 약속하였으니 그냥 현우(가명)라고만 하겠다. 현우에게 코인 투자를 권유한 지인의 논리는 이랬다.

"수익금 일부를 과학 연구단체에 기부하도록 설계된 아인스타이늄(Einsteinium)이란 코인이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에게서 이름을 따온 코인이다. 그래서 그의 생일인 3월 14일에는, 매년 그를 기념하기 위해 코인 가격이 폭등한다. 돈을 벌 수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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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논리지만, 실제로 2018년은 물론이고 2019년 3월 14일에도 해당 코인의 가격이 큰 폭(50% 이상)으로 올랐다. 귀납적 추론을 굳게 신봉했던 현우는 2020년 3월 초, 이 얘기를 듣고 마음이 혹해 계좌를 탈탈 털어 가진 돈의 거의 전부를 아인스타이늄 코인 매수에 썼다. 땀 흘려 노력하고 아끼고 절약한다고 해서 결코 돈을 모을 수 없다는 심리도 한몫했다.
대망의 2020년 3월 14일, 기대와 달리 아인스타이늄은 50% 이상 폭락했고, 현재는 대형 거래소에서 아예 상장 폐지를 당해 국내에서는 더는 거래되지 않고 있다. 주변 친구들이 위로의 술값을 내는 부수적인 피해를 겪은 건 투자 실패에 딸려온 덤이다.
이런 사기성 짙은 코인들이 아직도 다양하게 유통되고 있다. 국내 주요 코인 거래소에서 자체적인 필터링을 통해 일부를 퇴출하고 있긴 하지만 자율에 맡겨져 있다 보니 판단 기준은 여전히 느슨하며, 주식 시장의 ‘작전주’처럼 작정하고 시세조종 행위를 하더라도 처벌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멀쩡한 사업모델을 가진 코인을 개발하는 사람도 도매급으로 비난받고, 정상적인 코인에 투자한 사람도 등 떠밀려 손해를 본다. 시장은 혼란 그 자체다.

편리한 허수아비만 내세우는 무책임

현실이 이런데도 국내 금융 관료들과 책임 있는 정치인들의 반응은 늘 한결같다. 가상화폐는 법정화폐를 절대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코인’이라 불리는 재화의 성격을 심각하게 오해하여 발생하는 반응이다.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코인들이 초기에 가상화폐라는 명칭으로 소개됐기에 이를 새로운 화폐의 일종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지만, 현 상황에는 그리 맞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3월 크리스티 온라인 경매에서 6930만 달러(약 785억 원)에 낙찰된 미국 디지털 아트 작가 비플의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 NFT기술 덕분에 이런 가격이 가능했다. [사진 크리스티 홈페이지]

지난 3월 크리스티 온라인 경매에서 6930만 달러(약 785억 원)에 낙찰된 미국 디지털 아트 작가 비플의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 NFT기술 덕분에 이런 가격이 가능했다. [사진 크리스티 홈페이지]

현재의 코인들은 블록체인이라는 탈중앙화된 기록 보존 방식에 기반한 다양한 가상자산으로 폭넓게 확장됐다. 가령 최근 등장한 NFT(Non Fungible Token·대체 불가능 토큰)라고 불리는 방식의 코인은 마치 부동산 등기부처럼, 어떤 예술품에 대해 진본 디지털을 소유하고 있다는 증빙을 블록체인을 통해 진행한다. 온라인에서 괴짜들이나 사 모으는 특수한 기념품이란 생각이 들겠지만, 크리스티 같은 세계적 경매업체에서 수백억대에 낙찰되는 엄연한 상품이다.
변화에 맞춰 해외 규제기관에서는 시장 참가자 보호를 위해 법과 제도를 빠르게 정비하는 중이다. 그런데 국내 금융 당국은 여전히 가상'화폐’라는 편리한 허수아비만 때리며 일하는 시늉만 하고 있다. 규제 공백을 해소하기보단, 코인 시장이 정규화되는 걸 막겠단 헛된 아집이 더 커서다. 극단적으로는 국내 거래소를 폐쇄한단 주장도 나오고 있는데, 대안이 될 수 있는 해외 거래소도 많이 존재하는 데다, 청년들이 왜 유독 코인 시장에 몰리는지를 이해하지 않고는 이런 불법화 정책은 절대 결실을 볼 수 없다.

고승범 금융위원장 후보자가 지난 27일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질의에 답하고 있다. 뉴스1

고승범 금융위원장 후보자가 지난 27일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질의에 답하고 있다. 뉴스1

‘어른’들이 모르는 코인하는 마음

요즘 회사에서는 오전 9시 정각만 되면 화장실 좌변기 칸이 꽉 차는 일이 잦다. 직장인들의 배변 습관이 동기화된 게 아니라, 오전 9시 주식 개장에 맞춰 상사 눈치를 안 보고 주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재테크에 유별나게 관심을 갖는 일부 사람만 이러는 게 아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묵묵히 회사생활 하던 주변의 평범한 직장인들이 다들 그렇게 변했다.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착실히 근로소득을 모아도, 계층 이동은커녕 계층 유지도 버겁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탓이다. 부부가 같이 벌어도 아파트 전세금이 빠듯하다면, 주식을 통한 가외 소득으로라도 이를 벌충하겠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단기 일자리를 전전하는 이들의 사정은 더 나쁘다. 주식 투자를 위한 자본도, 지식도, 이 둘을 쌓을 시간마저도 부족하니, 이들에게는 코인이 유일한 자본소득 획득 경로다. 소수점 단위로 쪼개 소액으로도 살 수 있고, 변동성 덕에 한 번의 성공이 큰 수익을 낼 수도 있지만, 이게 위험한 걸 모르는 이는 없다. ‘어른’들이 이뤄왔다고 주장하는 성공의 길은 끊긴 지 오래인데, 위험한 산 비탈길을 걸어서라도 삶을 나아지게 하려는 게 그리 비난받을 일일까. 차라리 중국 청년의 무기력한 태업인 탕핑(躺平·'드러눕다'는 뜻으로 힘들게 일하지 않고 편하게 살겠다는 의미)보단 훨씬 나은 태도다.

지난 4월 은성수 당시 금융위원장은 코인에 대한 견해를 묻자 “잘못된 길로 가면 어른들이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30일 2년 만에 물러나면서 "2030 분노는 이해한다"면서도 "(당시 발언은) 실언이 아니라 마음먹고 한 얘기"라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런 오만한 지적에 앞서 나와야 할 건, 코인을 비롯한 자본 소득 추구에 몰두하는 것 외에 새로운 계층 이동의 경로를 제시하는 일이다. 그런 걸 제시할 깜냥이 되지 못한다면, 시세조종 행위에 대한 처벌과 같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도 만들어서 청년들을 보호하려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책임감 있는 어른의 도리, 아니 금융당국 수장의 도리라고 믿는다. 실제로는 왜 코인에 뛰어드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설픈 지적만 하는 건 사양한다.

금융위원장이 바뀌어도 정부의 이런 꼰대스런 지적질이 계속 이어질 것 같아 걱정스럽다. 은성수 위원장에 이어 업무를 시작한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지난 27일 인사청문회에서 코인과 관련해 "정책 기조의 변화는 없다"고 단언했다.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긴 안목으로 봤을 때 과연 무엇이 잘못된 시그널인지, 신임 고 위원장은 제대로 고민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