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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 자발적 은둔 10년, 숙성된 와인 같은 『수상록』 썼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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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3호 26면

와글와글 

와인은 만남이고 연결이다. 와인을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신선한 생각과 연결된다. 역대급 폭염이 계속되던 지난여름 뜻깊은 와인을 선물 받았다. 소믈리에 경연대회 우승자 출신의 와인 칼럼니스트이며 출판사 경영자인 김성실 대표가 준 레드와인이었다. “비싼 와인은 아니지만 좋아할 것 같아서 한 병 가져왔어요.”

『수상록』을 쓴 몽테뉴

『수상록』을 쓴 몽테뉴

와인병의 레이블을 읽어 보니 샤또 미쉘 드 몽테뉴의 ‘에세(Les Essais)’라 적혀 있었다. ‘에세’는 프랑스어로 시험이나 질문을 의미하는데, 인생에 대한 성찰을 담은 몽테뉴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한국어로는 『수상록』이라 번역됐다. 이후 다양한 주제로 특별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서술하는 글쓰기 형식을 가리켜 영어로 ‘에세이’라 부르게 되었으니 몽테뉴는 에세이라는 장르의 창시자인 셈이다. 내가 와인을 매개로 서양의 글과 인문학을 새롭게 해석해 보는 취지에서 시작한 ‘와글와글’ 시리즈도 에세이, 그 와인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와인 가격이 아니라 스토리이니까.

샤또 미쉘 드 몽테뉴의 ‘에세’(Les Essais) 와인. [사진 손관승]

샤또 미쉘 드 몽테뉴의 ‘에세’(Les Essais) 와인. [사진 손관승]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에 따르면 몽테뉴는 “자기 자신 말고는 다른 누구도 섬기지 않았던” 모든 자유인의 조상이자 수호성인이며 친구였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이런 사람이 있어 삶이 견딜 만한 것이 된다”고 했고, 프랑스 대통령 시절 미테랑은 집무실에 몽테뉴의 초상을 걸어 놓았을 만큼 시대를 건너뛰어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었다. 팬데믹이 터지기 직전 파리를 방문했을 때 옛 소르본대학 근처 몽테뉴 동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숙소가 있었다. 시험을 앞둔 학생들은 몽테뉴 동상에 ‘안녕 몽테뉴’라 인사한 뒤 그의 우측 발가락을 만지는 전통이 있다고 하는데, 소문처럼 그의 발가락은 반들반들 변색돼 있었다.

법관이었던 그가 사회생활에서 물러나 탑으로 지어진 건물로 들어가 자기성찰과 글쓰기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1571년 2월, 서른여덟 살 때의 일이다. 츠바이크의 표현에 따르면 “괴테가 ‘치타델레’(Zitadelle)라고 불렀던 내적인 자아, 아무도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자아”를 탐구하며 10년을 보냈다.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작업이었다. 그는 작업실 천장에 라틴어로 54개의 격언이나 화두를 새겨 놓았는데, 딱 하나 마지막 것만 프랑스로 적어 놓았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Que sais-je?)’

현대 프랑스의 교양 문고본 ‘크세즈’ 시리즈의 이름이며,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스스로 물어야 할 화두였다. 아버지 사망 뒤 몽테뉴에게는 물려받은 가문의 성과 포도밭이 있었는데, 보르도 지방과 동쪽으로 경계를 이루는 베르쥬락이란 곳이었다. 글을 쓰면서 가까이하고 살았던 몽테뉴의 와인은 그곳에서 생산된 것이었으니 명상의 와인이면서 에세이의 와인이라 부를 만하다. 몽테뉴 사후 포도원 주인이 바뀌어 다른 가문이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몽테뉴의 인생이 흥미로운 것은 10년 만의 과감한 변신이다. 마흔 살이 되기 직전 자기 인생을 찾겠다며 자발적인 은둔생활을 감행했던 그는 1580년 6월 22일, 마흔여덟 살의 나이에 자기만의 어두운 동굴에서 스스로 걸어 나온다.

『수상록』 초고 집필을 마친 직후였다. 50이라는 나이테를 앞둔 영혼의 몸살이었을까? 그에게는 유전병인 심각한 신장결석이 있어서 유명 온천에서 광천수를 마시면서 치료도 하고 견문도 넓힐 겸 로마를 향해 떠난다.

뮌헨을 거쳐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을 넘어 이탈리아의 베로나와 베네치아, 볼로냐, 피렌체, 그리고 마침내 로마에 도착하는 여정은 200년 뒤의 여행자 괴테와 비슷하다.

다만 신장결석으로 인해 하루에 소변을 몇 번 보았는지 그 안에 섞여 나온 작은 돌멩이와 모래알 개수와 크기, 색깔이 자주 언급되는 게 특이하다. 그의 여행기는 원래 대중에게 공개할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기억의 저장용으로 적은 것이었고 사후에 발견돼 출판됐던 까닭이다. 그는 까다롭지 않은 식사 취향을 가졌다. 여행자로서 바람직한 태도다.

“다른 나라의 관습은 내게 그 다름으로 이미 즐거움을 준다. 나는 모든 관습이 그 나름으로 옳다는 것을 알았다. 주석 접시로 대접을 받든 목제 접시나 점토 접시에 대접을 받든, 내 접시에 올라온 고기가 끓인 것이든 구운 것이든 뜨겁든 차든, 버터를 주든 올리브 오일을 주든, 견과류를 주든 올리브 열매를 주든 내게는 상관이 없다.”

다만 와인의 경우는 그가 자주 배앓이를 했기에 ‘진하면서도 맛이 좋은 적당히 숙성된 와인’을 마셔야 했기에 동행했던 비서는 와인을 구하러 다니느라 힘이 들었다.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의 대공으로부터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고, 로마에서는 교황 그레고리 8세를 알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로마에서 가장 관심 있게 묘사한 것은 유대인 아기가 할례를 받는 의식장면이다. 집행자는 와인을 한 모금 삼킨 후에 자신의 손가락을 와인 잔에 넣어 적시고는 아이의 입으로 세 방울 떨어트려서 삼키도록 하며, 기다리고 있던 아기의 엄마와 여인들에게 이 와인잔을 그대로 가져다주고 남은 것을 마시게 하는 장면까지 세세히 묘사하고 있다. 와인에 집행자의 기도가 담겨 있어서 축복이 내려진다고 믿는다는 유대인의 믿음도 전하고 있다.

에세이를 쓰는 사람에게 화려한 바티칸도서관은 매력적인 곳, 그는 세네카 작품과 중국 책에 놀란다. 몽테뉴는 집을 떠난 지 17개월 8일 만에 고향에 돌아온다. 보르도 시장으로 선출됐기 때문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 프랑스는 가톨릭과 개신교 위그노 사이의 피 튀기는 종교전쟁이 벌어졌다. 동족끼리 분노에는 분노로, 잔인함에는 잔인함으로 응수했으며 페스트로 초토화됐던 시대다.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죽기 직전까지  『수상록』을 가다듬었다.

신선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 왔다. 몽테뉴의 얼굴이 그려진 와인병을 열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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