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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버라드 칼럼

북한에게 ‘도발’은 위험한 카드가 됐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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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지난 8월 북한의 미래에 중차대한 영향을 줄 것 같은 두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점령과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의 ‘중국 공산당의 역사적 사명과 행동가치’ 문건 발표다.

탈레반의 아프간 점령으로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에서 확실하게 떠났다. 심각한 궁핍에 직면해 해외원조가 절실한 북한 정권으로선 곤란한 일이다. 근래 영변 플루토늄 원자로를 재가동한 게 국제적 시선을 돌려놓기 위한 시도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는 실패했다. 다시 아프간으로 돌아갔으니 말이다.

해외원조 절실한데 국제적 관심 밖
협상용 도발, 중국 참지 않을 수도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의 문건 발표는 내용과 어조 모두 의미심장하다. 단호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새로운 중국의 도래로, 중국은 자국의 장기적 발전에 위협이 되는 어떤 것도 감내할 의향이 없다는 걸 분명히 했다. 문건 대부분은 미국을 향한 경고였다. 하지만 중국의 단호함이 여러 차례 자신들을 당혹스럽게 했던 완고하고 불안정한 이웃 국가에도 적용되리란 건 명확하다.

북한으로선 아무 조치도 안 하면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다. 경제는 추락하고 식량·유류난이 심각해지며 주민, 특히 엘리트 내 불만이 고조돼 정권을 위협할 수준에 이를 수도 있다. 중국의 원조는 충분하지 않은 듯하고 서방의 도움은 아직 없다. 국경을 열고 무역을 재개할 순 있으나 코로나19 확산 위험이 있다. 그런데도 미국의 대화 시도에 응하지 않고 있는 건 하노이 정상회담 실패의 기억 때문으로 보인다. 남한과 협상할 기미도 없는데, 남북 협상에 우호적인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간다.

결국 북한 정권이 협상 테이블을 재가동하기 위한 정치적 선택은 한 가지만 남는다. 영변 원자로 재가동과 같은 도발로, 과거부터 자주 사용했고 통했던 수법이다. 그러나 이번엔 중국이 참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은 대란(大亂)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이 있다.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에는 잠재적인 혼란까지도 무자비하게 억압했다. 특히 홍콩 사례가 북한엔 불길하다. 중국이 정치적 완력만으로도 진압했기 때문이다. ‘참을성이 준’ 중국이 보기에 북한이 도를 넘는다 싶으면 홍콩에 했듯, 북한에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은 자신들이 중국에 경제적·정치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걸 안다. 중국도 북한이 안다는 사실을 안다. 중국이 이를 어떻게 써먹을까. 그저 특정한 행동이 식량과 석유 공급을 어렵게 할 수 있다고 조용히 경고만 하면 된다. 점차 중국이 승인하지 않는 행동은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소련이 핀란드의 외교 정책(때론 국내 정책)에 거부권을 행사하던 것과 같은, 이른바 핀란드화(Finlandisation)다. 대단히 민족주의적인 북한 엘리트가 감내하려 하지 않을 순 있다. 항의시위라도 벌어지면 중국은 자국 이익 보호를 이유로 북한 정부에 중국인 고문관을 두게 할 수도 있다. 한때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우호 관계였던 게, 중국이 북한의 고위직 임명에 지침을 주고 중국 대사가 주요 정책 논의에 개입하며 북한 상류층 자녀들이 중국에서 중국어로 무상 교육을 받는 관계로 달라질 수 있다. 명목상 독립국가 말이다.

북한 지도층도 깨닫고 있다. 지난 몇 주 사이 연달아 회의가 열렸고, 28일 최고인민회의를 개최하겠다고 발표했다. 국가경제계획 등을 재검토한다고 한다.

이제 북한으로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도 없고, 도발하기에도 매우 위험해졌다. 진퇴양난이니, 혹여 과거엔 상상할 수 없던 일을 하게 되지는 않을까. 9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국제사회와 일종의 합의를 위해, 또는 문 대통령 임기 만료 전 남한과 모종의 거래를 위해 길을 내려 하지 않을까. 필자의 다음 칼럼이 게재될 무렵(4주 후)이면 그 결과를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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