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부동산, 해결말고 놔두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조민근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부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부디렉터

“부동산 문제, 더이상 해결하려 하지 말아주세요.”

지난 1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하소연이다. 육아휴직 중인 30대 여성이라는 청원인은 정부 부동산 정책의 난맥상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전셋집에서 언제 쫓겨날지 몰라 불안하다”고 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서둘러 회사에 나가야 할 것 같다는 푸념도 했다. “월급으로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주택담보대출도, 신용대출도 막겠다고 하니 월급이라도 모아야 반지하라도 마련하지 않겠느냐”는 한탄이다. 그러면서 “내놓는 정책마다 서민을 더 힘들게 하고 궁지로 몰아넣으니 그냥 문제를 해결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는 청원 아닌 청원을 했다.

이처럼 궁지에 몰린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던지 지난달 말 은행 대출 창구에선 북새통이 벌어졌다. 시중은행들이 일제히 신용대출 한도를 연 소득 이내로 줄이겠다는 계획을 내놓은 직후였다. 금융감독원이 은행 여신담당 임원들을 모아놓고 대출 한도 축소를 주문한 지 2주 만이다. 워낙 갑작스러운 요구였던지라 은행들은 처음에는 눈치를 봤다. 하지만 금융당국의 기류에 예민한 NH농협은행, 우리은행이 주택담보대출·전세대출까지 중단하는 초강수를 내놓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청와대 청원 오른 웃픈 현실
모피아, 부동산 해결사 자처
돈줄 틀어막으며 시간끌기

전형적 관치의 부활을 이끈 건 ‘돌아온 모피아’다. 옛 재무부에서 공직을 시작한 인사들이 금융위원회(고승범)와 금융감독원(정은보) 수장에 나란히 자리 잡았다. 특히 금융사를 직접 관리하는 금감원장에 관료 출신이 임명된 건 문재인 정부 들어 이번이 처음이다. 모피아의 장기는 뭐니뭐니해도 ‘급한 불 끄기’다. 재무부(MOF)에 마피아를 결합한 표현처럼 우악스럽긴 해도 정책수단을 찾아내고 일사불란하게 밀어붙이는 추진력은 관료사회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굵직한 경제 위기 때마다 늘 ‘대책반장’을 도맡았던 이유다.

서소문포럼

서소문포럼

관료집단보다 정치인과 학자 출신을 선호했던 청와대가 왜 이들을 기용하고, 어떤 미션을 부여했는지는 금세 드러났다.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리기도 전에 금융위원장 후보자는 간부들을 모아놓고 가계부채 문제가 최우선 과제라며 강도 높은 대책을 서둘러 주문했다. 가계부채 문제라고 했지만 난장판이 된 부동산 시장 뒷수습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한 건 사실이지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치솟는 집값과 전셋값, 들끓는 20·30세대의 불만은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여권에는 말 그대로 ‘발등의 불’이다.

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의 끝은 이처럼 미약하지만, 그 시작은 창대했다. 집값을 잡는 것은 물론 부동산 시장의 틀 자체를 바꿔놓겠다며 호기를 부렸다.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은 취임사에서 “부동산 정책은 투기를 조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부가 결정하는 것”이라며 투기세력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집값 상승이 실수요와 관계없다는 논리에 ‘적시 공급론’은 설 자리를 잃었다. 한 발 더 나가 “집은 사는(buy) 게 아니라 사는(live) 곳”이라며 훈계도 했다. 김 전 장관을 정치권에 등용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을 빌리면 서생의 문제의식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상인의 현실감각은 ‘제로’였다. 왜 굳이 집을 사려는지, 그것도 비싼 강남에 사고 싶어하느냐는 질문은 일반 국민이 아니라 부동산으로 문제가 된 수많은 여권 인사들에 먼저 해야 했다.

결국 무모함의 ‘끝판왕’격인 임대차 3법까지 통과됐고, 결말은 예상대로였다. 전셋값까지 동시에 솟구치며 시장은 카오스에, 정책은 수렁에 빠졌다. 참담한 실패 앞에 “부동산은 자신 있다”던 문 대통령과 청와대도 입을 닫았다. 이른바 ‘선택적 침묵’을 선택한 것이다.

대신 등 떠밀린 건 홍남기 경제부총리였다. 자신의 관할 밖인 금리인상까지 예고하며 “주택시장의 하향 안정세가 시장의 예측보다 큰 폭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걱정인지, 경고인지 모를 발언을 내놨다. 하지만 정책이 신뢰를 잃은 마당에 ‘닥터 둠(Dr.Doom)’ 흉내가 먹힐 리가 없다.

‘훈장질’도 ‘훈수꾼’도 소용없으니 결국 택한 게 모피아의 등판인 셈이다. 뒤늦게 긁어모은 공급대책의 퍼즐이 맞춰질 때까지, 기준금리가 의미 있는 수준으로 오를 때까지 최대한 틀어막으며 시간을 끄는 게 이들의 현실적인 역할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선의의 피해자도 속출할 것이다. 그나마 청와대 게시판 청원인의 바람처럼 정부가 근거 없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뭔가 적극적으로 더 하려는 의지는 접은 것 같은 모양새라는 건 위안 아닌 위안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