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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화폐 ‘운명의 날’이 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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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주정완 경제에디터

주정완 경제에디터

암호화폐 거래소에 ‘운명의 날’이 다가온다. 데드라인은 오는 24일이다. 이날까지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FIU)에 반드시 신고해야 한다. 미신고 거래소들은 무더기 폐업을 피할 수 없다. 지난해 3월 국회를 통과한 법안(특정금융거래정보법 개정안)에서 이렇게 규정했다. 법률이 정한 1년 6개월의 유예기간은 오는 24일로 종료한다.

최근 몇 년간 우여곡절이 많았던 암호화폐 거래소가 드디어 제도권에 첫발을 들인다. 국내법 체계에서 암호화폐 관련 사항을 규정한 것은 처음이다. 지금까지는 암호화폐에 대한 별도의 법률 규정이 없어 민법을 준용했다. 그동안 암호화폐 거래가 법적인 사각지대에 놓였던 이유다.

24일까지 미신고 거래소는 폐쇄
투자자 보호 장치는 여전히 미흡
반쪽짜리 제도권 편입 그칠 우려

제도권 편입이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금융당국은 본격적으로 규제의 고삐를 조일 태세다. 금융위는 암호화폐 거래소를 담당하는 조직(가상자산검사과)도 신설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반쪽짜리 제도권 편입이다. 암호화폐를 금융상품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금융당국의 태도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법 개정은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의 기준에 따라 불법자금 세탁과 테러 자금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암호화폐를 이용한 ‘검은돈’의 거래를 차단하는 게 금융당국의 1차 목표라는 얘기다.

암호화폐를 뭐라고 부를 것인지 용어 선택부터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느껴진다. 법적 용어는 어디까지나 가상자산이다. 암호란 말도, 화폐란 말도 안 썼다. 3년 전 국회에서 법안을 발의할 때는 가상통화란 용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입법 심의 과정에서 가상자산으로 바꿨다. 통화나 화폐라는 용어를 쓰지 않겠다는 금융당국의 의지가 엿보인다. 『홍길동전』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의 서러움을 연상케 한다.

지난 6일 오후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원이 운영하는 서울 용산구 고객센터 모니터에 암호화폐 시세가 표시돼 있다. [뉴시스]

지난 6일 오후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원이 운영하는 서울 용산구 고객센터 모니터에 암호화폐 시세가 표시돼 있다. [뉴시스]

가상자산이란 무엇인지 법률로 정의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특정금융거래법은 “가상자산이란 경제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서 전자적으로 거래 또는 이전될 수 있는 전자적 증표”라고 정의했다. ‘경제적 가치를 지닌 것’이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 교과서가 가르치는 화폐의 여러 가지 기능 가운데 ‘가치의 저장’을 제한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그렇다고 암호화폐의 가치가 안정적이라는 말은 전혀 아니다. 화폐나 금융상품은 아니지만 뭔가 가치가 있으면서 거래가 이뤄지는 자산이란 정도의 의미다.

암호화폐 거래소의 법적 성격은 여전히 애매모호하다. 법적으로는 거래소가 아니라 가상자산 사업자다. 한국거래소의 코스피·코스닥 시장 같은 투자자 보호 장치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만일 작전 세력의 시세조종이나 불공정 행위가 발생해도 암호화폐 투자자들이 보호를 받을 길이 없다.

그렇다고 정부가 암호화폐 거래를 완전히 민간 사업자의 자율에 맡기는 것도 아니다. 기존에는 사업자 등록만 하면 암호화폐 거래소를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크고 작은 암호화폐 거래소가 난립하면서 부작용이 심했다고 금융당국은 판단하고 있다. 특정금융거래정보법에서 암호화폐 거래소 신고제를 도입한 이유다.

업계에선 시간이 부족하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더는 미룰 수 없다는 게 금융당국의 판단이다.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31일 취임사에서 이 부분을 강조했다. 그는 가계부채에 이어 두 번째 현안으로 암호화폐를 꼽았다. 그러면서 “폭증한 유동성과 여타 요인들이 복합 작용한 가상자산(암호화폐) 시장 문제도 피하거나 미룰 수 없다”고 말했다. 고 위원장은 지난달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도 “기간 연장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업계는 오는 24일까지 신고서를 접수하는 암호화폐 거래소는 네 곳 정도에 불과할 것으로 보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들이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이번 기회에 부적격 업체를 한꺼번에 정리하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국회에는 자본시장법을 본떠 암호화폐 거래를 제도화하고 투자자를 보호하는 내용의 법안이 여러 건 발의돼 있다. 법안마다 세부적인 내용에는 차이가 있지만 큰 틀에선 비슷하다. 암호화폐 거래소 신고제가 1단계 제도권 편입이라면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법안은 2단계라고 할 수 있다. 고 위원장이 취임사에서 “근원적 제도개선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이미 늦은 감이 있다. 암호화폐 거래의 투명성을 높이고 투자자를 보호하는 것은 여야를 떠나 정치권 공동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