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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공(公)돈이 공(空)돈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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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염태정 기자 중앙일보
염태정 경제에디터

염태정 경제에디터

1억원은 큰돈이다. 웬만한 아파트 한 채가 10억~20억원하고, 공모주 청약에 수십조원이 몰리면서 숫자 감각이 무뎌진 탓인지, 1억을 가볍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일반인에겐 상당히 큰돈이다. 빚 갚아 본 사람은 안다. 비교적 금리가 낮은 주택담보대출로 1억원 빌려도 원금·이자로 한 달에 100만원씩 10년 정도 갚아야 한다. 월급에서 100만원이 빠져나가면 생활이 빠듯해진다. 그 빚을 갚는 동안 마음 한구석 묵직한 돌덩이가 내려앉아 있는 듯하다.

올해 태어난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엔 1억원을 나랏빚으로 짊어져야 할 거란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최근 5년간 국가채무 증가속도(코로나19 기간 제외)와 인구 전망치를 기준으로 생산가능인구 1인당 국가채무를 분석해 보니 2038년 1억502만원, 2047년 2억1046만원. 2052년에는 3억705만원으로 나왔다. 개인빚 1억과 나랏빚 1억의 무게는 다르지만 큰 금액인 것은 분명하다.

나라빚 1000조, 방치된 재정준칙
내년 1068조, 2025년 1408조 규모
국회 심의 중요한데 제 역할 의문
대선 의식한 선심성 돈풀기 유감

서소문 포럼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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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채무 증가 속도가 무섭다. 브레이크가 없는 듯하다. 정부가 내놓은 내년 예산안과 2021~2025 국가재정 운용계획을 보면 내년 국가채무는 1068조원에 달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처음으로 50%를 넘어섰다. 나랏빚은 계속 빠르게 늘어난다. 2025년엔 1408조, 채무비율 58.8%에 이른다. 604조4000억원 규모의 내년 예산에 대해 정부는 코로나19 위기 극복과 새로운 도약을 위한 예산이라고 말한다. 좋은 얘기다. 꼭 필요한 거라면 고리 빚을 내서라도 써야 한다.

문제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나오는 선심성·표잡기성 예산이다. 국가채무를 제대로 관리·통제할 원칙과 의지가 있느냐도 의문이다. 내년 청년층 지원 예산은 23조5000억원으로 올해 20조2000억원보다 3조3000억원 늘었다. 어려움 겪는 청년을 위한 지원은 필요하지만, 항목을 살펴보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나 싶은 게 적지 않다. 월 20만원씩 1년간 월세를 지원한다는데, 실질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다. ‘청년 마음건강 바우처’라는 사업도 새로 생겼다. 심리상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바우처를 월 20만원씩 3개월간 지급한다는 건데 역시 효과는 의문스럽다. 그러니 지난 재·보궐 선거 때 나타난 성난 청년층 마음을 잡아보려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선심성을 돈을 뿌리는 거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정부는 아니라고 펄쩍 뛰지만, 이런 사업이 곳곳에 꽤 보인다.

아무리 나랏돈을 내 돈처럼 아끼고 살뜰히 쓴다고 하지만, 공(公)돈은 공(空)돈이 되기 쉽다.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 아니라서다. 그러니 지역구 민원 해결을 위한 쪽지 예산이 사라지지 않고, 선심성·표잡기용 예산이 줄지 않는다. 일단 주면 줄이기도 어렵다.

거침없이 늘어나는 재정을 관리·통제하기 위해 정부는 지난해 10월 한국형 재정준칙 도입 방안을 발표했다. 국가채무·재정적자 등 건전성 지표가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하는 거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을 60%로 묶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게 제대로 역할을 하려면 법제화가 돼야 하는데 발표만 해놓고 거의 방치 수준이다.

제대로 된 논의도 없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 60%는 적절한 기준인가. 2015년 9월 문재인 당시 야당 대표는 박근혜 정부의 2016년 예산안을 놓고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재정 건전성을 지키는 마지노선으로 여겼던 40%가 깨졌다”고 비판했다. 그러면 현 정부 재정준칙상의 국가채무비율 60%는 적절한가, 아니면 40%가 맞는가. 60%는 너무 느슨한 기준 아닌가. 나랏빚 규정도 그렇다. 지금의 국가채무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갚아야 하는 빚만 계산하는데, 사실상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 공기업·공공기관의 빚은 어떻게 볼 것인가. 논의하고 결정해야 할 게 많은데 답보 상태다.

저출산·고령화와 맞물려 나랏빚 증가 속도에 대한 우려가 높다. 국내뿐 아니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는 얼마 전 국가채무의 급속한 증가를 한국 경제의 잠재적 위험 요인으로 지적했다. 정부는 다른 나라에 비해 양호하다지만, 엄격하고 체계적인 관리가 시급하다. 나랏빚은 결국엔 세금으로 감당해야 하고 미래 세대에 큰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정부도 정부지만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선거 앞두고 돈을 풀고 싶을지 모르겠으나, 국회가 예산 심의, 재정준칙 법제화에 제 역할을 잘 해줘야 한다. 그래야 공(公)돈이 공(空)돈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