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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힘들고 외로울 때 야한 상상하는 빅토리아 여인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70)

딸이 찾아가는 길을 응원하고 언제나 옆에 있겠다는 마음을 전한다. 모든 엄마가 같은 마음일거다. [사진 Ben Allan on unsplash]

딸이 찾아가는 길을 응원하고 언제나 옆에 있겠다는 마음을 전한다. 모든 엄마가 같은 마음일거다. [사진 Ben Allan on unsplash]

“난 늘 궁금했어 / 내가 어떤 사람인지 / 난 늘 기다렸어 / 날 이해해줄 알아봐 줄 한 사람 / 사실 다 알고 있는데 / 답은 내 안에 있는데.”

안나가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관객들 역시 나도 ‘나를 말하는 사람’이라는 듯 눈을 반짝이며 공감한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 여성에 대한 편견이 만연했던 보수적인 시기에 두려움을 떨쳐내고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써내려간 안나에 대한 응원 때문일까. 유독 안나 또래의 여성이 눈에 띄었다.

3년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 창작뮤지컬 〈레드북〉. [사진제공 아떼오드]

3년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 창작뮤지컬 〈레드북〉. [사진제공 아떼오드]

뮤지컬 ‘레드북’을 보러 가자고 한 건 딸 아이였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췄다는 평가를 받은 창작 뮤지컬에 대한 호기심이나, 앞서 말한대로 극이 전하는 ‘여성 서사’에 대한 관심을 가져서는 아니었을 거다. 워낙에도 뮤지컬 넘버들을 찾아 듣는 편이라 ‘레드북’의 메인 넘버인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 좋았고, 무엇보다 올림픽 이후 팬심을 갖게 된 양궁 금메달리스트 안산 선수가 이 뮤지컬을 보고 남긴 인스타그램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객석의 반응을 보니 ‘보다가 몇 번이고 별안간 벅차오름’이란 안산 선수의 SNS 피드가 자연스레 이해됐다.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통쾌하게 편견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서는 여성, 그리고 마침내 원하는 일과 사랑을 얻어낸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유쾌하게 펼쳐지는 로맨틱 코미디 형식의 뮤지컬이니 몰입감이 높은 건 당연하다. 공연을 보고 나서 최근 본 공연 중 최고라고 엄지척을 올린 딸의 반응만 봐도 그랬다.

누구든 힘이 들고 외로울 때가 있다. 안나는 그럴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하며 어두운 현실을 벗어나곤 한다. 이런 자신의 경험담을 직접 써 보기로 마음먹은 안나는 여성의 글을 모은 잡지 ‘레드북’에 자신의 소설을 싣는다.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되던 시대였으니 이후 스토리는 짐작이 갈 것이다. "사람들은 왜 제가 솔직할수록 저를 싫어하죠?”란 독백처럼 안나와 그의 글은 비난에 휩싸인다. 그러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욕망을 긍정하고 그 힘으로 자신을 이야기 한 안나는 이 모든 과정을 제대로 버텨낸다.

“하고 싶은걸 해”보는 건, 그리고 해내는 건 놀라운 경험이다. 돌이켜보니 나 역시 지금까지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결국 ‘하고 싶은걸’ 선택했다. ‘인간커뮤니케이션’라는 과목에 매혹되어 신문방송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고, 부모님은 걱정하셨지만 대학생활 내내 연극반 활동에 빠져 살았고, 인쇄된 글과 사진에 중독되어 오랜 시간 잡지를 만들었다. 연애도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대안이 있을 수 없다는 듯 그것만 바라보며 지내온 시간은 내가 선택한 것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긍정적 결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때론 선택한 그것에 책임을 지며 어려운 시간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기꺼이 힘듦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 과정을 통해 얻은 것을 잊지 않으려 했다. 지나온 길과 시간에는 그걸 거쳐야 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무대 위 안나를 바라보며 나의 20대와 30대를 떠올려 볼 수 있었고, 자신이 선택할 앞으로의 시간을 기대하며 눈을 반짝이는 딸 아이를 바라볼 수 있었다, 딸아이도 언젠가 ‘난 뭐지?’란 의문을 품게 될 거고, 그때마다 ‘나’ 다운 것을 향해 작은 발걸음을 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좋은 관극이었다.

‘나’답게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은 안나는 원하는 일과 사랑을 얻게 된다. [사진제공 아떼오드]

‘나’답게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은 안나는 원하는 일과 사랑을 얻게 된다. [사진제공 아떼오드]

지난주 딸이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다. 어려운 수술은 아니었지만 눈에 띄게 기운이 없어진 아이를 바라보며, 지금 아이가 이 경험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시간으로 남게 될지 생각해봤다.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돌보는 시간이 되길, 그래서 이후에도 계속 자신의 몸과 마음을 살피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물론 엄마는 그 모든 시간 너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너를 지지하고 응원할 거야). 언젠가 읽은 책의 한 구절을 딸에게 전하고 싶다. ‘30년 동안 미처 하지 못했던 그러나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이란 부제로 정신분석전문의인 저자가 엄마로서 쓴 편지 형식의 글이다.

인생에서 한 번 지나간 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 소중한 시간을 불평이나 한탄으로 날려 버리는 것만큼 미련한 짓은 없다. 그리고 남들을 이기거나 남들에게 지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기에 내 몫만큼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다. 그러니 딸아, 삶 속에서 재미를 놓치지 말아라. 생각지도 못한 고난이 찾아와 너를 시험할 때, 누군가 옆에 있어도 외로움을 떨칠 수 없을 때, 사는 게 죽기보다 힘이 들 때 그 말을 떠올리면 분명 큰 힘이 될 것이다.

-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한성희 지음/메이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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