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바닷속 큰놈만 낚아챈다…화수부두 노아의 특별한 그물 [별★터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톡.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톡.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주름살이 진 유동진씨의 양손 검지는 휘어져 잘 접히지 않는다. 심석용 기자

주름살이 진 유동진씨의 양손 검지는 휘어져 잘 접히지 않는다. 심석용 기자

“망치에 살짝 찍힌 건데 뭐. 배가 먼저였지 그땐…”

노인은 주름지고 굳은살 박인 손을 비비며 멋쩍어했다. 그의 양손 검지는 휘어져 잘 접히지 않는다. 수년 전 어선을 만들다 다쳤는데 병원 치료를 받지 않았다. 당시 그의 머릿속엔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그 배가 ‘선광호’다. 노인의 일터이자 삶의 의미가 담긴 곳이다. 주위의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배를 만든 그를 사람들은 ‘화수부두의 노아’라 불렀다. 방주를 만든 성경 속의 노아처럼 수년간 꿋꿋하게 배를 만든 유동진(76)씨 얘기다.

16살에 처음 탄 배, 만선을 꿈꾸다

유씨는 그만의 그물로 우럭, 놀래미 등을 낚아 만선을 이뤘다. 사진 유동진씨 제공

유씨는 그만의 그물로 우럭, 놀래미 등을 낚아 만선을 이뤘다. 사진 유동진씨 제공

인천 화수부두는 유씨의 고향이 아니다. 황해도에 태어나 한국전쟁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인천 덕적도로 넘어왔다. 배곯는 날의 연속이었던 타향살이를 견디다 못해 1961년 육지로 나갔다. 그러나, 국졸 16세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적었다. 방황하던 유씨에게 부두의 한 선원이 손을 건넸고 소년은 그를 따라 바다로 나섰다. 배멀미라는 낯선 고통과 한 달간 씨름했다. “뱃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선상은 끼니 걱정 없는 ‘호텔’이었다”고 회고했다.

성인이 되고 새로운 도전을 했다. ‘바다 사나이’를 꿈꾸며 해병대에 지원했는데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값진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파병 덕분에 ‘나만의 배’를 가질 밑천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해병대 모자를 즐겨 쓴다.

전쟁까지 경험한 20대의 유씨에게 바다는 더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제대 후 9만5000원으로 산 목선 ‘석태호’와 함께 만선의 꿈을 꿨다. 잠수해서 그물이 바닷속에 깔리는 모습을 살폈고 어떻게 해야 생선을 많이 잡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이 시기를 “이병에서 중사로 진급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계급이 오르는 것처럼 어부로서 몇 단계 더 성장했다는 얘기다.

침몰사고 이후 배 건조 결심

지난달 3일 유씨의 목선 선광호가 화수부두에 정박해 있다. 화수부두의 배는 밀물이 들어오면 바다로 나간다. 심석용 기자

지난달 3일 유씨의 목선 선광호가 화수부두에 정박해 있다. 화수부두의 배는 밀물이 들어오면 바다로 나간다. 심석용 기자

‘어부 계급’이 올라갈수록 더 좋은 배를 탔지만, 사고가 터졌다. 2007년쯤 아들과 함께 조업을 나가던 중 배에 물이 차는 사고가 발생했다. 임시로 덧대놓은 부분이 빠지면서 배가 침몰했다. 구명정을 타고 아들과 함께 탈출하면서 그는 이런 다짐을 했다. “나와 내 가족이 안심하고 탈 수 있는 배를 직접 만들겠다.”

작업을 마치고 휴식 중인 유동진(왼쪽)씨와 부인 강영자씨. 사진 유동진씨 제공

작업을 마치고 휴식 중인 유동진(왼쪽)씨와 부인 강영자씨. 사진 유동진씨 제공

구조된 배를 고쳐서 쓰다 2011년부터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설계도조차 그려본 적 없던 그가 망치와 톱을 잡자 주위에선 “미쳤다. 불가능하다”고 말렸다. 하지만, 그는 자기 눈대중과 뱃일로 익힌 노하우(know-how)를 믿기로 했다. “직접 만들면 절약도 되고 튼튼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직접 재료를 구하고 설계 그림을 그리며 배의 밑바닥부터 만들어나갔다.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그림을 그리고 작업을 하다 보니 시행착오가 많았다. 그간의 노력이 수포가 되는 날도 있었다. 가족에게 면목이 없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아내에게 작업장 밖으로 나가라고 소리를 쳤다.

“2년쯤 걸리지 않겠냐”했던 작업이 길어지면서 모아둔 돈이 바닥났다. 은행에 빚을 졌고 평생을 번 돈으로 장만한 집도 팔아야 했다. 작은 집으로 이사하던 날에도 유씨는 작업에 열중했다고 한다.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도록 망치질을 하는 그를 부인 강영자씨는 묵묵히 기다려줬다.

5년 만에 부활한 선광호

한창 목선 건조 작업에 매진 중인 유동진씨. 사진 유동진씨 제공

한창 목선 건조 작업에 매진 중인 유동진씨. 사진 유동진씨 제공

‘돈키호테’ 같은 그의 도전은 5년만인 2015년 12월 결실을 보았다. 길이 12.5m, 너비 4.1m, 8.55t의 배 ‘선광호’가 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씨는 “영종도 어부에게 샀던 4번째 배 이름이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그 이름에 정감 가서 새 배에도 그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진수식 때 아내에게 선장이 입는 제복을 맞춰 선물했다고 한다. 선장의 예우를 받은 부인 강씨는 참아왔던 눈물을 터트렸다고 한다.

배가 바다에 뜬 이후, 유씨는 다양한 손님을 맞이했다. KBS 인간극장 〈노인과 바다〉편을 통해 유씨의 이야기가 알려졌기 때문이다. 전국은 물론 일본에서 화수부두까지 찾아온 손님도 있었다. 홋카이도에 왔다는 한 일본인은 “어렸을 땐 아버지가 어부인 게 싫었던 날도 있었다. 두 분의 이야기를 보고 아버지를 더 이해하게 됐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초보 어부 위한 이정표로 남길 

홋카이도에 사는 일본인이 유동진씨 부부에게 보낸 편지. 사진 유동진씨 제공

홋카이도에 사는 일본인이 유동진씨 부부에게 보낸 편지. 사진 유동진씨 제공

방송까지 탄 유명한 어부가 됐지만, 유씨의 꿈은 여전히 어부다. 생선을 잘 잡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으로 계속 남고 싶다고 했다. 자신을 어떤 별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별★터뷰]의 질문에 유씨는 “예전에 길을 잃으면 북극성을 보면서 방향을 가늠했듯이 초보 어부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이정표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은 찾아온 이들에게 자신만의 그물을 전수하고 있다. 이유를 묻자 “배를 직접 만들고 나만의 그물 비법을 알려주는 건 모두 후세대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유동진만의 그물이 뭔가.
나는 그물을 직접 만들어 쓴다. 시중에 파는 그물은 구멍이 작아서 작은 고기까지 낚아챈다. 작은 고기는 잡아봐야 고생만 하고 돈벌이가 안된다. 나는 실을 조금 굵게 하고 그물을 크게 해서 ‘큰놈’만 잡는다. 미래를 생각한 것도 있다. 작은 고기까지 다 잡으면 후대엔 물고기가 씨가 마르지 않겠나. 나 말고 후손들도 생각해야지. 다른 어부에게 내 그물을 선뜻 건네는 것도 이런 마음에서다.
부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결혼하고 신혼여행도 못 갔다. 식 끝나고 근처 공원 한 바퀴 돈 게 전부다. 아들딸 낳고 키우느라 고생 많았는데 내가 배 만드는 동안에도 힘들게 했다. 배 만들 때 아내가 없었으면 이미 탈진해 죽었을 거다. 일할 때 끼니를 잘 안 챙겼는데 아내는 내가 즐겨 먹는 핫케이크를 항상 가져다주더라. 망치질할 때마다 옆에서 노래도 불러주고. 그 덕에 5년을 견뎠고 지금도 살아가는 것 같다. 배만 다 만들면 고생 안 시킨다고 했는데 아직 빚을 갚아가는 중이라 미안한 마음이 있다. 지난번에 비행기로 제주도 여행 다녀와서 그나마 다행이다. (웃음) 아내는 늘 고마운 존재다.
앞으로의 목표는.
코로나19 때문에 어시장이 많이 안 열리면서 요새는 조업 가는 횟수가 줄었다. 코로나 상황이 풀리길 기다리면서 체력도 보충하고 그물도 연구할 생각이다. 90살 맞는 14년 후까지 물고기 잡으려고 한다. 남은 빚도 갚아야 하고…(웃음). 그렇게 계속하면 나중에 ‘선광호!’하면 ‘아, 그 노아 유동진!’하고 사람들이 딱 알아봐 주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