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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위기 출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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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현예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김현예 P팀장

김현예 P팀장

불행의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임신 테스트기에 두줄 반응이 나왔을 때, 아니 그보다도 훨씬 이전. 난자와 정자가 만나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고, 엄마라 불러야 할 모체의 자궁에 사뿐히 뿌리를 내려앉았을 그때였을지도 모른다. 태어나 살아온 날들을 손가락으로 꼽는 게 더 빠를 이 아이는 첫 번째 대수술을 받고 타인의 돌봄을 받고 있다. 병원 기록 아기의 성명란엔 ‘미상 아기’로 쓰여있다.

슬프게도 사람들은 이 생명을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발견한 아기’로 기억한다. 아이는 분명히 이 땅에 태어나 숨을 쉬고 있지만, 대한민국 시스템상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갓 낳은 아이를 엄마가 음식물 쓰레기통에 유기했기 때문이다. 출생 신고가 없으니, 아기는 무명(無名)이다.

아기는 죽음의 고비에서 사투를 벌이는 중이다. 얼마 전 목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15㎝에 달하는 상처로 봉합 수술을 받았다. 통상의 환아라면 보호자의 동의를 거쳐야 했지만, 충북대병원은 이 아기를 수술대에 올렸다. 살리는 일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근 사흘에 달하는 시간 동안 유기됐던 아기는 패혈증을 앓고 있다. 병원은 또 한 번의 수술을 진행해야 할지를 저울질하고 있다. 분유조차 삼키지 못하는 아기는 최근 병원에서 탯줄이 떨어졌다.

안타깝게도 앞으로 이 생명이 넘어야 할 산은 너무 높다. 병원에 따르면 출생신고를 하는 데만 한 달이 넘게 걸린다. 이마저도 아기 친척들과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법무부에서 여성아동인권과장을 지낸 김영주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는 이 아기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의 씨앗을 ‘위기 출산’이라고 칭했다. 엄마가 임신을 한 단계부터 제도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그 틀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얘기다. 임신이 확인된 순간부터 나라가 제공하는 진료비와 출산 지원을 받을 수가 없으니, 출생 등록은 더 어려운 일이다. 우여곡절 끝, 아기가 영아살해미수 혐의로 구속된 엄마의 친자로 등록된다 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이어진다. 친권이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잠룡들의 경쟁이 치열하다. 유력 후보로 꼽히는 인물들이 공약을 앞다퉈 발표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위기 출산과 그로 인해 제대로 양육 받지 못하고 벼랑 끝에 놓이는 무명 아이들을 위한 제도 정비는 내놓지 않는다. 악순환은 이렇게 되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