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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아비로서의 고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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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주영 기자 중앙일보 기자
장주영 내셔널팀 기자

장주영 내셔널팀 기자

기원전 3000년, 즉 5000년 전에도 학교가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남쪽 지방, 오늘날 이라크 남부의 수메르(Sumer) 지역이다. 수메르인이 남긴 점토판에는 학교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수메르학 연구자 새뮤얼 노아 크레이머(1897~ 1990) 전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이를 ‘인류 최초의 학교’라고 규정했다. 그는 점토판에 적힌 쐐기문자를 토대로 수메르 연구에 평생을 바쳤고,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를 펼쳐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아버지들의 엄청난 교육열이다. 점토판에는 ‘아들을 잘 부탁한다’며 교사에게 촌지를 건네는가 하면, 학업에 열중하지 않는 아들에게 ‘그러다 뭐 될래?’라며 다그치는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히 기록돼 있다고 한다. 크레이머 교수에 따르면 당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아버지는 사회 특권층이었다. 피지배 계급은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이 불가능했던 셈이다.

반만년이 지나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적어도 특권층만 학교에 갈 수 있는 세상은 끝났다. 열심히 공부하면 누구나 좋은 학교에 갈 수 있는 교육 사다리가 표면적으론 존재한다. 하지만 고대 수메르와 비슷한 장면도 여전하다. 일부 사회지도층의 어긋난 교육열이다. 이들은 기어코 자식을 좋은 학교에 밀어 넣으려 한다. 이게 입시 비리나 부모 찬스 논란으로 이어지며 문제가 된다.

부산대는 지난 24일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의 의학전문대학원 입학 취소 결정을 내렸다. 조씨가 제출한 인턴 경력에 대해 부모 찬스 논란이 있었고, 1·2심 재판부가 모두 허위라고 판단한 점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조 전 장관은 부산대의 결정이 나온 직후 소셜미디어에 “아비로서 고통스럽다”고 적었다. 자초한 일이지만 딸의 학위는 물론 의사 면허까지 무효가 될 처지니, 아버지로서 고통은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조 전 장관이 자신의 고통에만 갇혀있지 않길 바란다. 품앗이하며 자식 스펙을 만드는 부모보다 공부하는 자식을 묵묵히 응원하는 평범한 가붕개(가재·붕어·개구리) 부모가 세상엔 더 많다. 부모 찬스 뉴스가 나올 때면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해준 게 별로 없다’는 자괴감이나 무력감 같은, 아비(어미)로서의 고통을 느껴오지 않았을까. 조 전 장관이 이제야 느낀다는 그 고통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