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선

정약용도 개탄할 ‘언론재갈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조선시대 실학 사상을 일군 다산 정약용(왼쪽)과 성호 이익의 초상. [중앙포토]

조선시대 실학 사상을 일군 다산 정약용(왼쪽)과 성호 이익의 초상. [중앙포토]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쪼그라든 언론을 걱정했다. 군주의 잘잘못을 따져야 할 언론의 회복을 외쳤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언론기관은 사간원(司諫院)이다. 임금의 전제적 권력을 제어하는 역할을 했다. 사간원에 속한 간관(諫官)은 독립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왕과 상충하는 말도 거침없이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순지거부(順志拒否)다. 도끼 맞아 죽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 지부극간(持斧極諫)도 갖춰야 했다.

언로 확대 강조한 다산과 성호 

 한데 다산이 보기에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간관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고 여겼다. 오랜 당쟁과 사화(士禍) 탓인지 간관들은 윗사람 눈치를 살피는 데 바빴다. 다산이 호되게 꾸짖었다. “무릇 간관이 된 자가 앞뒤를 둘러보고 감히 입을 열지 못한다. 오직 낭패한 사람을 물에 밀어 빠뜨리고 돌로 내리치는 것을 직분으로 할 따름”(『경세유표』)이라고 비판했다.
 다산은 무엇보다 간관의 자질을 문제 삼았다. “(조선) 중엽 이전에는 아주 깨끗하여 이 관직을 맡은 자가 그 직을 능히 수행했다. 근세에는 관제가 나날이 어지러워졌다. 한미(寒微)하고, 용렬한 사람을 뽑아서 그 자리를 채워놓으니, 앞뒤만 둘러보며 감히 입을 열지 못한다.” 다산의 질타는 계속됐다. “한번 이곳에 들어왔다가는 그 신명(身名)을 보존한 자가 드문즉, 천하의 희극으로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다.”
 다산은 사간원의 혁파를 주장했다. 언로의 확대를 요구했다. 소수 집권층의 여론 통제를 예방하는 조치였다. 역사칼럼집『실학의 숲에서 오늘을 보다』를 최근 낸 김태희 전 실학박물관장은 “다산은 언론탄압이란 오해를 염려해 사간원을 존치하되, 간관 겸직 등을 통해 다양한 경험과 입장을 지닌 인사가 언론을 담당하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비판 막으면 군주도 기혈 막혀 숨져”  

 다산에 앞서 간관의 추락을 통탄한 실학자가 있다. 성호(星湖) 이익(1681~1763)이다. 다산에도 큰 영향을 미친 성호는 특히 군주의 책임을 강조했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유자(孺子·어린아이)의 말도 들을 수 있고, 꼴꾼·나무꾼에게 물어볼 수도 있다”며 “여러 사람의 지혜를 물리치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한다면 크고 좋은 옷과 띠를 두르고 거만하게 활보하다가 기혈이 막혀 끝내는 난쟁이로 쪼그라드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계했다. “그(임금)의 사망도 기약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조선시대 언론기관인 사관원이 있던 자리. 경복궁 동쪽 건춘문 맞은 편에 비석이 놓여 있다. 사진 완쪽 아래 비석에는 '조선시대 국왕의 잘못을 충고하여 정치를 바로잡던 관아터'라고 적혀 있다. [사진 너머북스]

조선시대 언론기관인 사관원이 있던 자리. 경복궁 동쪽 건춘문 맞은 편에 비석이 놓여 있다. 사진 완쪽 아래 비석에는 '조선시대 국왕의 잘못을 충고하여 정치를 바로잡던 관아터'라고 적혀 있다. [사진 너머북스]

 성호 역시 언론 활성화를 제안했다. “지금의 사간원은 헛되이 기관만 설치해 놓고 있다. 차라리 간직(諫職)을 겸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했다. “당파·벼슬 따지지 말고 인재만을 뽑자”, 심지어 “과거에 합격 못 했다고 재주가 용렬한 것은 아니다”는 혁신론을 폈다. 그는 간관을 나라의 병을 치료하는 의원(醫員)에 비유했다.
 성호의 판단은 명료했다. 언로를 막는 가장 큰 걸림돌로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집권자를 들었다. 한때 아랫사람의 충언을 경청했으나 나중에 이를 멀리해 폭군이 되고 목숨도 잃은 고대 중국의 걸(桀)과 주(紂)에 빗대 “후세에 나라를 망친 임금들은 소걸(小桀)과 소주(小紂)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태산이 무너지고 우렛소리가 진동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다.
 조선 9대왕 성종(재위 1469~1494) 때 안착한 사간원이 후세에 무너진 건 간쟁이 당파 싸움으로 변질하고, 사대부 또한 이 자리를 기피하는 현상이 심화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정두희에 따르면 성종 집권 25년 동안 연평균 10명이 바뀐 사간원(정규인원 5명) 간관은 조선 후기 경종(재위 1720~1724) 통치 4년 동안 연평균 16명 넘게 교체됐다. 성호는 그 첫째 원인으로 승정원(承政院)을 꼽았다. 왕명 출납(出納)을 맡은, 즉 국왕 비서기관인 승정원이 “시의에 어긋난 말이라고 생각하면 (선비들의) 진언이 채택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린다”고 질타했다. 언론다운 언론이 설 수 있는 자리를 차단한 셈이다.

이 시대 ‘천하의 희극’ 끝은… 

 개명천지 민주사회, 21세기 한국에서 또다시 언론이 위협받고 있다. 언론재갈법으로 비판받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해 국내는 물론 국제 여론도 연일 걱정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집권 여당은 여전히 ‘모르쇠’ ‘벽창호’ ‘고집불통’이다. 절대다수라는 힘만 믿고 24일 법사위, 25일 본회의 통과를 강행하려 한다. 조선시대에 견주기에도 부끄러운 ‘천하의 희극’이다. 조선시대에도 임금에 대한 간언에 대해선 죄를 묻지 않는 대간불가죄(臺諫不可罪)가 보장됐다. 여당·대통령에 묻고 싶다. “그토록 앞날에 자신이 없는가. 용렬한 선택의 끝이 두렵지 않은가.” 다산·성호가 200여년 전 이미 대답한 질문이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