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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사물과 대화하는 ‘인공언어’ 코딩의 태생적 한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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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오민수의 딴생각(10)

새로운 관점에서 인류 역사를 재조명해 보자. 인류는 지금까지 세 번의 언어 발달 과정을 거쳐왔다. 그것은 말, 문자, 코딩이다.

인류는 언제부터 말을 하게 되었을까? 태초에 모든 포유류가 짐승의 소리를 내고 있을 때 인간만이 어느 순간 말문이 틔었을 것이다. 인류 최초의 대화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건 인류 진화의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진화는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지금으로부터 400만 년 전, 인류는 직립 보행을 하기 시작하면서 척추 질환을 앓기 시작했다. 그리고 3만 년 전부터는 음식을 먹다가 질식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게 무슨 자랑인가 싶겠지만, 이 또한 인류 진화의 위대한 사건이다. 인간은 발성을 담당하는 후두가 목구멍 깊숙이 들어가는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음식을 먹다가 질식할 수도 있게 되었지만, 덕분에 정교하게 발음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비로소 짐승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백만 년 동안 먹고 마시고 새끼를 낳는 일 말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던 인류가 그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엄청나게 창의적인 동굴벽화를 그리고 활과 낚시로 협동심을 발휘한 흔적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그것은 정교한 언어 체계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크로마뇽인이었고, 비로소 언어를 사용한 문화인의 탄생이었다.

코딩은 어느덧 그 쓰임새가 넓어져 딱히 제약이랄 게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젠 수학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스포츠 등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역이 코딩의 대상이다. [사진 pxfuel]

코딩은 어느덧 그 쓰임새가 넓어져 딱히 제약이랄 게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젠 수학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스포츠 등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역이 코딩의 대상이다. [사진 pxfuel]

그렇게 말을 하는 문화, 즉 ‘구술문화’는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 정점에 다다른다. 대표적인 인물이 소크라테스였다. 그처럼 말하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도 드물다. 그는 구술이야말로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며 자신이 체득한 것이 입을 통해 나왔을 때 진정한 앎이라고 믿었다. 그는 대화와 질문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산파술’을 터득했고,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언사로 구술문화의 정점을 찍었다. 다만 말하기만 강조했기 때문인지 그 어떤 저작도 남기지 않았는데, 다행히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당시에 발명된 그리스 알파벳으로 스승의 언사를 몰래 기록했다.

그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격언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기록한 책 『파이드로스』, 『크리톤』, 『파이돈』은 모두 소크라테스가 직접 쓴 게 아니라 플라톤의 저작이었다. 그렇게 인류는 구술문화에 이어 문자문화 시대에 돌입했다. 마주 보는 사람과 정보 교류가 가능했던 일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정보 교류가 가능해졌고, 그것은 정보와 지식이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수천 년을 이어온 인류의 자산이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16세기에 이르자 정보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인쇄기의 발달은 문자 문화의 혁신이었다. 일부 고위층과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던 정보와 지식은 인쇄기를 타고 일반 대중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책을 누구나 소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저항도 있었다. 사람이 손으로 직접 쓴 글자만이 진정한 문자라고 인식하는 시대적 정서가 있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지식이란 지식의 값어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라는 기득권 세력의 저항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시대의 흐름을 멈추지는 못했다. 결국 책을 통해 정보는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되었고 독서로 무장한 군중은 ‘집단 지성’을 이루며 정보를 더욱 널리 전달했다.

그리고 21세기, 인류는 또 새로운 언어를 맞이했다. 구술이 마주한 사람과 정보를 주고받는 언어였고, 문자가 시공간을 초월해 불특정 다수와 교류하는 언어였다면, 이제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과 정보 교류를 하는 언어를 만들어 냈다. 그 언어란 바로 코딩이다.

컴퓨터를 통해 복잡한 수학 문제를 푸는 수준이었던 코딩은 어느덧 그 쓰임새가 넓어져 딱히 제약이랄 게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젠 수학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스포츠 등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역이 코딩의 대상이다. 학교에선 코딩 교육이 의무화가 되었다. 요즘 학생들은 ‘국영수’가 아니라 ‘국영수코’라고 말하며 요즘 청년들은 취업을 위해서라도 코딩을 배운다. 내가 있는 ‘삼성청년SW아카데미’만 해도 매년 수많은 청년이 코딩을 배우러 온다. 이제 그들은 직장이라면 ‘네카라쿠배(네이버, 카카오, 라인, 쿠팡, 배달의민족)’에 더 주목하고 있다.

그들이 배운 코딩은 자동차가 자율주행을 가능케 하고 인공지능을 구현할 머신러닝을 만들며, 사물인터넷을 현실로 만들고 현실을 초월하는 메타버스도 만들 것이다. 단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코딩은 디지털 전환 시대에 거의 모든 사물을 다룰 수 있는 궁극의 언어지만, 사람이 주고받는 ‘자연어’가 아니라 ‘인공언어’일 뿐이다. 이런 언어의 문제 때문일까? 간혹 이것은 인간의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곧이곧대로여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넷플릭스는 나와 맞지 않는 취향의 영화를 추천해 주기도 하고, 인스타나 페이스북은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을 자꾸 보라고 알려주기도 한다. [사진 pxfuel]

넷플릭스는 나와 맞지 않는 취향의 영화를 추천해 주기도 하고, 인스타나 페이스북은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을 자꾸 보라고 알려주기도 한다. [사진 pxfuel]

구글이나 네이버 같은 포털이 우리가 일방적으로 이용하는 검색엔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누구나 인지하고 있다. 거꾸로 그것은 우리를 이용하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우리를 어떤 정보에 노출시키거나 우리가 검색한 결과를 활용하기도 하고 때론 그 정보를 이용해 민감한 프라이버시를 노출시키기도 한다. 구글과 네이버만 문제가 아니다.

가령 넷플릭스는 나에게 이상한 취향의 영화를 자꾸 추천해 주기도 하며, 인스타나 페이스북은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을 자꾸 보라고 알려준다. 아마존은 어찌 된 영문인지 누군가의 생리 주기를 알고 있으며, 유튜브는 ‘문어’를 검색하니까 자꾸 ‘주호민(만화가)’을 보여준다.

더 심각한 문제도 있다. 어떤 자율주행차는 운전자를 보호하기 위해 보행자를 다치게 한다. 어느 범죄 예방 인공지능은 유독 흑인한테만 가혹했으며, 어느 배달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배달 노동자를 혹사시켜 죽음에 이르게 했다. 또 어떤 신용평가 시스템은 가난한 사람을 더 가난하게 만들었다.

진화란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인가 보다. 인류가 직립 보행을 시작하니까 척추 질환이 왔고 말을 하기 시작하니까 질식사가 온 것처럼, 우리가 코딩으로 만들어 낸 수많은 알고리즘이 때론 인간을 위험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사물과 대화를 하는 궁극의 언어, 코딩을 사용하면서 간과한 것이 있다. 인공지능 분야의 전문가들은 그것이 공정성·정확성·투명성·윤리성의 문제라고 지적하지만, 좀 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인간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이었다. 우리는 코딩을 통해 알고리즘을 구현했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휴머니즘을 망각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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