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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아는 걸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깨달아가는 글쓰기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오민수의 딴생각(9)

천장이 높은 파주의 어느 카페. [사진 오민수]

천장이 높은 파주의 어느 카페. [사진 오민수]

천장이 높은 곳이 인간의 창의력을 증가시킨다고 한다. 주말이 되면 노트북을 들고 천장이 높은 카페를 찾아다닌다. 글을 쓰기 위해서다. 가장 좋은 자리를 골라 앉아 가만히 천장을 응시해 본다. 이제부터 나의 지각 능력은 천장만큼 높아지리라. 왠지 좋은 글이 술술 나올 것만 같은 기대감에 가슴이 설렌다.

노트북을 켠다. 천장은 드높은데 화면은 단호하다. 하얀 화면 위에 깜빡이는 커서가 나를 재촉하는 것 같다. 무슨 글을 쓸 거냐고.

마흔이 되어서야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나이가 되면 쉽게 흔들리지 않아 ‘불혹’이라고 하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마흔은 불혹이 아니라 ‘미혹’이었다. 내 마음은 더 자주 흔들렸고 쉽게 갈팡질팡했다. 앞을 보기보다는 망설이며 뒤돌아보는 게 익숙해지는 나이, 앞을 봐도 두근거림보다는 살 떨림이 더 많아지는 나이가 마흔이었다.

직업, 여가, 관계, 재산 같은 삶의 구성 요소들이 익숙해질수록 희한하게도 행복감은 더 낮아진다고 했다. 인생의 행복 곡선이 U자 곡선을 그린다는 것은 맞는 말이었다. 마흔은 바닥을 치는 나이, 나는 그 U자 곡선의 가장 밑바닥에서 펜을 들었다.

마흔 이전에도 글을 썼지만, 그때는 아는 것만 썼다. 돌아다니며 본 것, 먹은 것, 경험한 것만 썼다. 내면의 욕구보다 육체의 욕구가 커서 그런지 글들이 화려했다. 쓰지 않아도 되는 글, SNS용 글쓰기, 그 글의 문체는 ‘잘난체’였다.

마흔의 글쓰기는 달라졌다. 아는 것은 거르고 모르는 것에 집착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글자로라도 보고 싶어서 썼다. “글을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면, 글을 쓰지 마라”라고 했던 릴케의 말처럼, 안 쓰면 내가 사라질 것 같아서 썼다.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글, 살기 위한 글쓰기, 그 글의 문체는 ‘필살체’다.

나도 몰라서 쓰는 글은 문법이 다르다. 아는 게 없으니 어떤 글을 쓸 것인지 계획하지 않는다. 서론·본론·결론도 없고 기승전결도 모른다. 생각의 파편을 나만의 언어로 채워나가는 일은 가늠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게워내는 일이다. 토악질처럼 거칠게 쓰고 느리게 다듬어 나아갈 뿐이다. 그것은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써야 하는 시행착오의 글쓰기다. 흔들리는 마음을 더욱 세차게 흔들어보니 어느새 문자로 침전하는 기적의 글쓰기다.

작문을 배운 사람이라면 이런 글쓰기는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마흔의 글쓰기는 그런 식이어야 한다. 이미 그 나이를 거쳐 간 선구자들이 그렇게 글을 쓰기도 했다. 아무튼 쓰기 힘든 건 맞으니까, 막막한 마흔은 천장이 높은 카페라도 기대며 글을 써야 한다.

밤하늘이 펼쳐지는 마장호수의 카페.

밤하늘이 펼쳐지는 마장호수의 카페.

때로는 알코올에 기대기도 한다. 어떤 날은 작정하고 거칠게 쓸 요량으로 위스키가 들어간 아이리시 커피를 주문했다. 한 모금 들이켜고 천장을 올려다본다. 그곳 카페엔 커다란 창문이 있었는데, 그 창문을 통해 밤하늘 별이 보였다. 위스키 덕분인지 나의 지각 능력은 천장을 넘어 저 별까지 닿을 기세였다.

마흔의 글쓰기는 저 하늘 별과 같다. 구체적인 주제가 떠오르기보단 막연한 소재나 뜬구름 같은 글감에서 문장이 나아간다. 머릿속엔 대강의 큰 그림이 있지만 명확하진 않고 흐릿하다. 어쩌면 몇 개의 단어가 줄거리와 상관없이 듬성듬성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밤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멀리 떨어져 있다. 그 별들 사이를 먼눈으로 그으면 별자리가 만들어지듯, 머릿속에 반짝이는 것을 나만의 시각으로 선을 긋는다. 선이 별에 닿으면 글쓰기가 전개된다. 이런 글쓰기를 철학자 김진영은 ‘별자리적 글쓰기’라고 했다.

별자리적 글쓰기는 먼저 계획하고 쓰는 건축학적 글쓰기와는 다르기 때문에 내 글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아니, 모르는 상태로 글을 밀고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쓰다 보면 처음 떠올랐던 의도가 폐기되기도 하고 쓰다 보니까 생각이 틀리기도 하고 이야기를 고쳐쓰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막연한 앎이 구체적 깨달음으로 문장을 토해낸다. 마크 트웨인은 이것을 ‘시행착오 기법’이라고 했다.

마흔의 글쓰기는 별자리와 같으며 시행착오의 글쓰기다. 그것은 이미 아는 것을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깨달아 가는 글쓰기다. 이런 글쓰기는 처음 시작할 때 내 글이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서사적 궤적이 끝나갈 때쯤에서야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것이 내가 아는 마흔의 글쓰기다.

바다가 펼쳐진 봉포 해수욕장의 노천카페.

바다가 펼쳐진 봉포 해수욕장의 노천카페.


마흔의 글쓰기를 하는 어떤 남자가 있었다. 그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 글을 썼는데, 아무리 글을 써도 고난과 역경이 가시지 않자 도인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그는 도인에게 이 고난과 역경을 피하려면 어찌해야 되냐고 물었고, 그러자 도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는 글을 쓰는 사람이 맞는가. 글을 쓰는 사람이 어찌 고난과 역경을 피하려고 하는가. 필력만으로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때로는 아픔을, 때로는 분노를, 때로는 증오를 글에 담을 수 있어야 비로소 삼라만상의 이치가 글에 담기는 것이라네. 신이 인간에게 자비와 사랑을 보여준다면, 작가는 인간에게 분노와 증오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거늘, 어찌 글을 쓰는 자가 아름다운 인생만 고집하려 하는가.

작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평범한 인간처럼 고난과 역경 안에서 허우적대지 말고, 그 고난과 역경마저 원고지로 내려다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전지적 작가 시점’이 완성되는 것이라네.

자, 어서 펜을 들어 고난과 역경으로 돌아가시게.”

멀티캠퍼스 SERICEO 전직지원사업 총괄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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