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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 달러 광물 잠자는데 아편 수출 의존…탈레반 경제 어디로

중앙일보

입력

“다른 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방안을 탐색 중이다. 여성 인권도 존중하겠다.”(17일 카불 점령 후 첫 기자회견)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모든 국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우리는 어떤 나라에도 적대적이지 않다.”(19일 독립기념일을 맞아)

파죽지세로 세계 최강의 미군마저 내쫓고 아프가니스탄 대부분 지역을 점령한 탈레반이 최근 내놓은 성명들이다. 서구 사회에 대한 과격한 비판을 넘어 비난하던 이들이 맞나 싶게 유화적이다. 신앙심과 총칼로는 이길 수 없는 또 하나의 전쟁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빵 하나 못 먹는 현실' 못바꾸면 무너져 #1조달러 광물 있어도 원조 없인 무용지물 #중국과 밀착하지만, 완전한 신뢰 어려워 #전문가들 "악의 화신 취급보단 대화 먼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18일(현지시간)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을 규탄하는 시위가 열린 가운데 한 소년이 휴대전화와 달러를 들어 보이고 있다. [로이터=뉴스1]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18일(현지시간)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을 규탄하는 시위가 열린 가운데 한 소년이 휴대전화와 달러를 들어 보이고 있다. [로이터=뉴스1]

‘최빈국'에서 더 추락 땐 내전 부를 수도

지난 19일(현지시간) 알자지라 방송에 따르면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아프가니스탄의 경제 상황은 처참하다.

아프간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198억 1000만달러(약 23조 4400억원)로 일본 정부가 도쿄올림픽·패럴림픽에 들인 200억달러(약 23조 6700억원)보다도 적다. 전체 국민(약 4000만명)의 절반 가까이(47%)가 빈곤선 이하로 살고 있다. 취업자의 34.3%가 하루 1.9달러(약 2200원)로 생활한다. 세계은행의 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아프간은 조사 대상 190개국 중 173위를 기록했다. 오랜 내전 등으로 산업 기반이 무너진 상태기 때문이다.

16일(현지시간) 이슬람 무장 단체 탈레반 대원이 아프가니스탄 카불 국제공항에서 나온 사람들의 소지품을 검사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16일(현지시간) 이슬람 무장 단체 탈레반 대원이 아프가니스탄 카불 국제공항에서 나온 사람들의 소지품을 검사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안타까운 것은 아프간의 경제 사정이 느리지만, 해외 원조를 통해 천천히 나아지고 있었단 점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미군 치하 아프간에 국제사회가 본격적인 원조를 시작한 2003년 이후 아프간 경제는 연평균 9%의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지난 2015년 이후부턴 2.5% 정도로 성장률이 둔화했지만, 여전히 각종 지표는 개선되고 있었다.

이는 GDP의 42.9%(2020년 기준)에 해당하는 국제사회 원조 덕이었다. 아프간은 공공 지출의 75%를 해외 원조를 통해 조달하며 각종 산업 현대화를 진행해 왔다.

탈레반의 집권 이후 이 모든 원조가 끊길 위험에 처했다. 애초 미군 철수 협상에 들어있던 아프간 민간인들의 무사 이동 보장 등이 지켜지지 않는 데다 탈레반 대원이 부르카를 입지 않았다고 여성을 처형했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말과는 다른 행동'이 잇따르자 국제사회는 기존에 있던 아프간 자산마저 동결했다.

이달 14일 기준 아프간의 외화 보유액은 90억달러(약 10조3000억원) 수준인데 대부분 미국이 쥐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에 70억달러(약 8조2800억원)가 보관돼있고, 국제결제은행(BIS)과 기타 국제계좌에 각각 7억달러(약 8300억원)와 13억달러(약 1조5000억원)가 있다. 아프간 중앙은행의 아즈말 아흐마디 총재는 18일 트위터를 통해 “탈레반이 수도 카불의 중앙은행 금고를 뒤져봤자 전체 외환의 0.1~0.2%만 접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많아야 1800만달러(약 210억원) 외에는 모두 쓸 수 없는 돈이란 얘기다.

지난 18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동부 낭가르하르주 주도 잘랄라바드에서 탈레반 반대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탈레반 대원들이 차량 주변에 모여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18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동부 낭가르하르주 주도 잘랄라바드에서 탈레반 반대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탈레반 대원들이 차량 주변에 모여 있다. [AP=연합뉴스]

이에 대해 이희수 성공회대 이슬람문화연구소장은 “기존 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반발했을 뿐이지 탈레반에 완전히 아프간의 미래를 맡기겠다는 국민은 별로 없다”며 “빵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하는 현실을 개선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예전을 그리워할 것이다. 탈레반이 무너지는 것도 아슈라프 가니 정권과 마찬가지 과정을 겪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미 지난 19일 아프간 통화 아프가니의 가치는 미국 달러당 80.66으로 일주일 전과 대비해 7% 이상 떨어졌다. 자국 통화 가치 하락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질 경우 식료품 가격이 폭등하는 등 빈곤층이 가장 직격탄을 맞게 된다.

‘광물의 사우디’ 아프간, 개발은 어떻게

인부들이 지난 2010년 아프가니스탄 카불 남부 메스 아이낙에 위치한 광산에서 구리를 캐고 있다. [AP 연합뉴스]

인부들이 지난 2010년 아프가니스탄 카불 남부 메스 아이낙에 위치한 광산에서 구리를 캐고 있다. [AP 연합뉴스]

다만 탈레반이 아프간과 함께 얻은 것도 있다. 1조달러(약 1176조원)가치의 광물이다.

아프간에는 철, 구리, 금 등 광물을 비롯해 희토류와 충전용 배터리에 쓰이는 리튬이 다량 매장돼 있다. 지난 2010년 지질학자들의 평가에서 1조달러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최근 친환경 산업이 주목을 받으며 그 가치는 더 늘어났을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 2010년 미군의 한 최고위급 지휘관은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아프간의 광물 잠재력은 깜짝 놀랄 수준(stunning)”이라고 말했다. 미 정치전문지 더힐은 아프간에 매장된 희토류 가치를 약 3조달러(약 3537조9000억원)로 추정했고, 미국 정부는 아프간의 리튬 매장량이 최대 리튬 매장국 중 하나인 볼리비아와 비슷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수십 년간의 전쟁으로 기반 산업이 무너진 아프간은 광산업을 일으킬 인프라가 없는 상황이다. 독일 비정부기구 극단주의대응프로젝트의 한스 야콥 쉰들러 선임국장은 “이 자원들은 90년대에도 땅속에 있었고 (당시에도) 탈레반은 추출할 수 없었다”며 “이 자원들은 아프간 경제를 성장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독일 공영방송 도이치벨레(DW)에 말했다.

탈레반에 화답한 中도 고심 빠져

왕이 부장(오른쪽)과 바라다르 탈레반 부지도자. [중국 외교부 제공=연합뉴스]

왕이 부장(오른쪽)과 바라다르 탈레반 부지도자. [중국 외교부 제공=연합뉴스]

탈레반이 국제사회에 유화 손짓을 보내는 건 경제 안정화를 위해서라도 우호세력이 필요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9일 ABC방송 인터뷰에서 “탈레반이 변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호세프 보렐 유럽연합(EU) 외교‧안보 정책 고위대표도 지난 17일 회원국 외무장관과의 화상회의를 마친 뒤 “탈레반이 전쟁에서 이겼기에 우리는 그들과 대화해야 할 것”이라면서도 “탈레반을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한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앞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도 “탈레반을 합법 정부로 인정하는 일을 서두르지 않을 것”이라고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반면 지난달 중국 톈진에서 탈레반 정치지도자 압둘 가니 바라다르를 직접 만났던 왕이(王毅) 중국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여느 국가들과 온도차를 보이고 있다. 왕 부장은 지난 19일 도미닉 라브 영국 외무장관과의 통화에서 “국제사회는 더 많은 압력을 가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방향으로 더 격려하고 이끌어야 한다”며 “중국은 내정 불간섭을 전제로 계속해서 아프간 문제에 건설적인 역할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물론 중국 역시 이슬람 테러 단체 동투르키스탄이슬람운동(ETIM)과 탈레반의 연계 가능성 등을 우려하기 때문에 긴장을 늦추진 않고 있다. 중국은 지난 9일부터 13일까지 병력 약 1만명을 동원해 북서부 닝시아 자치구 칭통샤 연합군 전술훈련 기지에서 합동 군사훈련을 하는 등 유사 상황에도 대비하는 움직임이다.

‘최악의 아편 소굴’ 전락할 수도  

아프가니스탄 철군 이전 미군이 한 아편 재배지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사진= 미 국방부 제공]

아프가니스탄 철군 이전 미군이 한 아편 재배지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사진= 미 국방부 제공]

한편 이희수 교수는 “탈레반을 악으로만 상정하고 국제사회가 모두 돌아선다면 이는 더 큰 재앙을 부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합법적인 자금 조달이 어려워질 경우 ‘검은돈’에 눈을 돌릴 수 있다면서다.

아프간은 전 세계 아편·헤로인의 80%를 공급하는 최대 아편 수출국이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에 따르면 지난해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프간의 양귀비 재배 면적은 전년보다 37% 늘어난 22만4000㏊를 기록했다. 버넷 루빈 전 아프간 주재 미국 대사는 알자지라 인터뷰에서 “아프간에서 불법 마약은 전쟁 다음으로 큰 산업”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알자지라는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탈레반은 2000년 아편과의 전쟁에 나섰다가 민심을 잃은 경험이 있어 이번에는 그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자금 동원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아편 산업을 펼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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