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월드컵축구보다 인기 더 좋았죠”
『그때는 정말 열기가 대단했지요. 경평전이 열릴 때면 장안엔 온통 축구얘기뿐이었어요.』
44년 만의 축구 경평전 부활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경성선발팀 선수로 출전했던 이유형옹(이유형ㆍ80ㆍ체육인동우회 고문)은 『잃었던 자식을 되찾게된 기분』이라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당시 경평전이 그렇게 인기가 높았습니까.
『정말 엄청났지요. 경기장인 휘문고보(현 현대건설자리) 앞길은 아침부터 장사진이었고 미처 입장못한 사람들은 경기장밖에서 아우성이었어요. 지금의 월드컵축구와 아사안게임엔 비할 바가 아니었어요.』
그럼 경기내용도 치열했을 것 같은데.
『경성ㆍ평양간의 라이벌의식이 대단했지요. 서로 지지않으려고 맨땅에서도 이를 악물고 뛰었습니다.
경기중엔 「걷어차라」는 등 악담ㆍ욕설이 난무했어도 다친 사람 하나 없었어요. 서로가 다 아는 선ㆍ후배 사이라 우애도 있었구요. 끝나면 친한 상대편 선수들을 집에 초대해 밤을 새워 식민지하에서의 인생얘기ㆍ축구얘기ㆍ사랑얘기 등 정담을 나누기도 했지요. 일제에 핍박받는 한민족이라는 핏줄의식이 서로 강하게 작용을 했지요.』
당시 식민지하에서 그런 경평전이 어떻게 열리게 됐습니까.
『당시는 일제가 3명만 모여도 결사를 한다고 잡아가던 압제기였어요. 그러나 문화정책의 이름아래 종교ㆍ스포츠행사만은 허용을 했습니다. 이때 경성의 조선체육회와 평양의 관서체육회가 주축이 돼 「압제하에서 젊은이들이 민족정기를 드높이고 패배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축구대항전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이 팽배했지요.』
당시 선수들도 꽤 인기가 있었다면서요.
『여학생들이 하도 따라다녀서 혼났지요. 평양 기림리운동장에서 시합할 때면 평양기생들도 한복차림에 단체로 구경오고. 참 낭만이 넘치던 시절이었습니다.』<신동재기자>신동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