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의 경성축구팀 선수/이유형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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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요즘의 월드컵축구보다 인기 더 좋았죠”
『그때는 정말 열기가 대단했지요. 경평전이 열릴 때면 장안엔 온통 축구얘기뿐이었어요.』
44년 만의 축구 경평전 부활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경성선발팀 선수로 출전했던 이유형옹(이유형ㆍ80ㆍ체육인동우회 고문)은 『잃었던 자식을 되찾게된 기분』이라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당시 경평전이 그렇게 인기가 높았습니까.
『정말 엄청났지요. 경기장인 휘문고보(현 현대건설자리) 앞길은 아침부터 장사진이었고 미처 입장못한 사람들은 경기장밖에서 아우성이었어요. 지금의 월드컵축구와 아사안게임엔 비할 바가 아니었어요.』
­그럼 경기내용도 치열했을 것 같은데.
『경성ㆍ평양간의 라이벌의식이 대단했지요. 서로 지지않으려고 맨땅에서도 이를 악물고 뛰었습니다.
경기중엔 「걷어차라」는 등 악담ㆍ욕설이 난무했어도 다친 사람 하나 없었어요. 서로가 다 아는 선ㆍ후배 사이라 우애도 있었구요. 끝나면 친한 상대편 선수들을 집에 초대해 밤을 새워 식민지하에서의 인생얘기ㆍ축구얘기ㆍ사랑얘기 등 정담을 나누기도 했지요. 일제에 핍박받는 한민족이라는 핏줄의식이 서로 강하게 작용을 했지요.』
­당시 식민지하에서 그런 경평전이 어떻게 열리게 됐습니까.
『당시는 일제가 3명만 모여도 결사를 한다고 잡아가던 압제기였어요. 그러나 문화정책의 이름아래 종교ㆍ스포츠행사만은 허용을 했습니다. 이때 경성의 조선체육회와 평양의 관서체육회가 주축이 돼 「압제하에서 젊은이들이 민족정기를 드높이고 패배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축구대항전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이 팽배했지요.』
­당시 선수들도 꽤 인기가 있었다면서요.
『여학생들이 하도 따라다녀서 혼났지요. 평양 기림리운동장에서 시합할 때면 평양기생들도 한복차림에 단체로 구경오고. 참 낭만이 넘치던 시절이었습니다.』<신동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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