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정자를 가리켜 「산수가 좋은 곳에 쉬거나 놀기 위해 지어놓은 조그만 집」이라고 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이 같은 사전적 의미만으로 정자를 연상해 본다면 정자란 한낱 무미건조하고 실용성 없는 건축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기능론적 시각에서 잠시만 벗어나면 정자가 지닌 휴식과 오락의 공간으로서의 의미 이상의 진수를 발견하게될 것이다.
『이 몸 삼기 실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한생 연분이며 하늘 모를 일이런가/나하나 젊어있고 님하나 날 괴시니/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데 전혀 없다.』 이렇게 시작되는 『사미인곡』은 송강 정철이 남긴 시조문학의 백미다. 송강은 조선조 선조시대 전남 담양지방에 3년간은 거하는 동안 『성산별곡』과 함께 이 불후의 명작을 낳았다.
그가 이 두 작품을 구상하고 쓰는 동안 줄곧 그 무대가 됐던 곳이 바로 죽녹정(일명 송강정)이었다. 전남 담양군 고서면 증암강변에 위치한 죽녹정 앞뜰에는「송강정 선생 시비」가 있고 이 시비에는 『사미인곡』의 전문이 새겨져 있다.
송강의 작품들은 그런 점에서 정자문화의 꽃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한국의 정자에는 이처럼 시정이 배있다. 전주의 취향정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절묘해 예부터 시인·묵객들의 관상터였고 목가시인 신석정의 시비가 있으며, 강릉 경포대는 「경포월삼」이라는 유명한 일화를 간직하고있다.
우리 나라 정자에는 또 전설도 많다. 밀양의 영남누에는 죽음으로 순결을 지킨 아랑의 전설이 있고, 목포의 나선각에는 삼학도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또 남원 광한루에는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과 정절이 깃들여있으며 양양 의상대는 고승의 불심과 멋이 숨쉬는 곳이다.
그런가 하면 한국의 정자에는 신라 선비들이 강론을 폈다는 경주 이락당과 의기 논개가 왜장(모곡촌륙조)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진주 촉석루 등도 있다.
충무 세병관이나 진주 촉석루 등은 영풍금월의 시정 어린 곳이라기 보다는 전시 작전 지휘본부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정자는 남한지역에만 50여 개에 이른다. 이들 대부분의 정자는 그 위치가 십중팔구 강을 끼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탁 트인 전망과 비단 같은 강줄기, 휘영청 밝은 달은 정자가 자리잡기 위한 필수조건들이다.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고, 그 원리를 바탕으로 인간적인 친화를 도모코자 했던 선조들의 시정과 삶의 양식이 우리고유의 정자문화를 꽃피웠던 것이다. <글·사진 김준범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