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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팔산가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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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팔산의 다카토리야키(고취소)는 심심산골에 자리잡고 있었다.
후쿠오카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쯤 달리다 국도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어서도 30분쯤은 산속 길을 달린 것 같다.
스기나무 숲속 여기저기엔 산판이 벌어져 있고 재목을 켜고 남은 땔감나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 장작을 때는 가마를 아직도 유지할 수 있는 마을이다.
고취소는 때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 속에 소박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고이시하라(소석원)에 널찍하게 터를 잡고 있었다.

<350년 일궈온 일터>
고취소라는 큼직한 간판이 있는 길가에 도자기 가게가 있고 안쪽으로 쑥 들어가면 왼쪽에 조상을 모신 사당과 전면에 고색창연한 일본식 본채 건물이 있고 본채에 잇대어 오른쪽으로 팔산의 작품을 전시·판매하는 전시실과 가마·작업장이 있다.
뒷산에는 조상의 묘를 모셨고 계곡에 흐르는 물을 이용해 물레방아까지 만들어 태토를 만들기 위한 돌가루를 빻고 있었다.
모든 것이 조화롭게 구비된 작업과 생활환경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2대 팔산으로 이어지기까지 3백50년 가까이 여기서 도공의 낢을 살다 간선조들이 조금씩 일궈놓은 결실이다.
작업장에서 물레를 돌리고 있는 팔산은 6척 장신에 떡 벌어진 당당한 체구, 굵고 허스키 한 목소리에서 대륙의 기개가 느껴지는 61세의 노인이다.
팔산은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그릇이 완성되었다며 자랑스럽게 물레에서 막 들어낸 다기하나를 보여주는데 경주 부근에서 가져온 흙으로 만든 것이라 했다.
초대 팔산은 임진왜란 때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흑전리정)에 의해 부인·아들이 함께 끌려와 이곳 영주인 구로다의 어용요(영주의 요)에서 일하게 된다.
역시 도공인 장인도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를 따라 일본에 오지만 가토계의 가마가 없어지자 이곳에 와서 팔산과 함께 어용요의 일을 하게된다.
다카토리(고취)란 가마가 있던 다카토리(응취)산의 이름인데 고려인이 와서(당시 일본은 조선을 고려로 부르기도 했다고 함)만든 요라하여 고취소로 불리게 되는데, 당시 고취소에는 팔산부부와 장인만 조선인이었고 나머지는 일본도공을 채용해 돕게 했으므로 팔산이 어용요의 우두머리인 셈이었다.
『당시 3백50석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무사계급 신분으로 조선에서의 도공생활과는 비교가 안 되는 대접을 받고 있었음에도 선조 팔산은 일본이 임진왜란 후 다시 조선과 교류를 시작하자 고향으로 둘려보내 줄 것을 청원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구로다 영주의 노여움을 불러일으켜 팔산은 귀향은커녕 산전촌의 산전요로 쫓겨나 6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팔산은 쫓겨났지만 그가 만들어 놓은 다카토리 도자기들이 그 시대의 명품이라는 평가를 받게되자 구로다는 팔산을 다시 불러들인다.

<해마다 순회전시>
어용요의 도공으로 재기용된 팔산은 명다 도구를 만들어 다인들의 애호를 받고 구로다가는 이를 중요한 보물로 취급하게 된다.
어용요에서는 영주가 갖고싶어하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도기도 굽고 식기도 굽고하여 종류가 다양하다.
영주가 유약을 바른 단단한 자기가 갖고 싶다고 해서 팔산은 좋은 흙을 찾아 구로다 영내(우리나라도회 두개 망친 정도의 영토라 참)의 이곳저곳용 옮겨다니며 가마를 일구다 네 번 째 요인 백기산요에서 사망한다.
부모와 참께 어린 나이에 끌려와 부친 못지 않은 명도공이 된 2대 팔산은 1655년 고이시하라로 옮겨와 어용요인 고취소를 일구고 정착한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이곳은 심심산골이라 영주가 자주 와서 구경할 수가 없습니다. 고취의 그릇을 자주 보면서 이것저것 주문을 하고 싶어한 영주는 성 가까이에 또 하나의 요를 만들게 합니다. 히가시 사라야마(동명산)요 이지요.』
그러나 명치시대가 되면서 영주가 없어지자 성 가까이에 있던 가마도 없어지고 영주 전속가마에만 쓸 수 있던 고취라는 유명한 이름도 일반 도공들이 마구 쓰게 되면서 한때 10여곳 이나 생기게 된다.
고취도자기는 일곱가지 유약을 섞어 쓰기도 하는 등 유약이 특이한데 적갈색·미색이 얼룩진 듯 불규칙하게 번져 소박하고도 따뜻한 느낌을 주는 도자기다.
후쿠오카현을 대표하게 된 고취도자기의 명성은 수많은 도자기 애호가들을 이 산골짜기까지 불러들이고 있으며 팔산은 매년 한차례씩 대도시를 중심으로 순회전시를 갖는다.
팔산에게 사사한 일본인 도공들은 고이시하라를 중심으로 독립가마를 만들어 소박한 민예 도자기를 만들고 있는데 히다·온다·고이시하라와 같은 새로운 생활자기를 탄생시켰다.
고취소를 찾기 위해 산길을 헤매던 중 들르게된 이웃 마을도 도자기 마을로 그중 가장 큰 가마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긴 가마 옆구리에 연신 장작을 쑤셔 넣던 도공이 『이 가마는 2개월마다 한번씩 불을 때는데 마침 잘 오셨소』하면서 인사했다.

<11대 땐 며느리로>
4백년이란 긴 세월 동안 도공가계를 지켜오자면 언제나 아들대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닌 듯 11대 팔산은 10대 팔산의 며느리, 즉 지금 12대 팔산의 어머니에게 맥이 이어졌다.
『여자가 도공의 맥을 이어준 것은 우리 어머니뿐입니다. 어머니는 다카토리 도자기의 맥을 잇기 위해 전후 어려운 시기에 많은 고생을 하시면서도 다카토리 도자기를 아름답게 발전시킨 중흥조 이십니다.』
팔산 가문에서의 어머니 역할을 그 어느 조상보다 높게 평가한다는 12대 팔산은 4백년간 이어온 「고취 팔산요」라는 명칭조차 이후에는 어머니인 세이잔(정산)의 이름을 따라 「정산준」라고 부르겠다고 한다.
팔산의 집 본 채 한방에는 똑같이 생긴 두개의 유리 진열장이 나란히 있는데, 한 폭은 초대 팔산의 작품을 진열하고, 또 한쪽은 11대 팔산의 작품을 진열해 12대 팔산이 어머니를 선조대와 동격으로 모시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초대 팔산의 작품 중에는 특히 유배되기 전의 도자기들이 유명한데 3대 영주에 의해「중요문화재」로 인정받기도 하여 지금도 규슈 도자자료관과 도쿄 네즈(근율)미술관에도 소장되어 있다.

<짬나면 고국 찾아>
11대 팔산은 70년대 우리 나라 신세계 백화점에서 전시회서 가진바 있고 매스컴에도 등장했는데, 12대 팔산이 보여준 누렇게 바랜 1975년도 한국 일간신문 스크랩에는 팔산의 어머니가 한국을 방문, 고아 2명을 데려온 이야기가 실려있었다.
팔산은 어머니와의 첫 고국방문 때 선조 팔산이 파격적인 대우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하던 고향 땅을 꼭 가보고 싶었지만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고령군이 선조 팔산의 고향으로 생각됩니다. 고령에 팔산동과 이동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와 구로다가 지나갔던 곳이기도 하고 주위에 고요지가 많이 남아있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고향을 찾은 이후 팔산의 고국방문 횟수는 잦아진다.
선조들이 만든 명다완 책을 펴놓고 고려·조선의 그릇에 담긴 혼을 잇는 작업을 하다 이곳 고이시하라의 흙으로 원하는 「느낌」이 안나올 때는 한국으로 날아가 고향 땅의 흙을 가져다 만들기도 한다.
이날 작업장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마음에 든다」는 그릇도 경주부근에서 가져온 흙으로 빚은 것이라 했다.
『우리 가문은 장수복을 누린 것 같습니다. 우리 조상을 끌고 온 왜장 구로다계는 지금 15대인데 제가 12대이니 오래 사는 편이지요.』
고취소 뒷산에는 초대 팔산과 11대 팔산인 어머니의 묘가 정성스런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이날 13대 팔산이 될 아들(29세)은 마친 도쿄에 다니러가 만나지 못했으나 도공으로서의 수업을 충실히 받는 중이라 했다.
글·사진:김민숙(서강대 강사·사진 작가) 공동 취재:송성희(미소화랑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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