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북,「허상」에서 벗어나는 길/유승삼(중앙칼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어쩔 수 없이 또 한번 설레는 마음으로 「남북의 만남」을 지켜본다.
남북의 기본적인 입장차이로 보나,그동안 번번이 실망을 주었던 「대화」들의 경험으로 보나 마음을 설레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닥치면 또 「혹시나」하는 기대를 고개들게 하는 게 바로 남북대화다.
냉철한 사람들은 통일은 감정이 아니라 현실이라며 그런 우리들의 기대를 은근히 나무라기도 한다.
그러나 남북대화에 거는 온 겨레의 기대와 바람은 못난 자식에게도 끝내 단념할 수 없는 어버이의 심정과 같은 것이다.
실망과 분노,안타까움과 답답함으로 이미 가슴속이 숯덩이가 되어버렸는데도 그것에 매번 새로이 불을 지피는 것은 우리들의 비극적인 역사와 오늘의 삶이 개인적으로나 전체적으로나 결코 서로 나뉘어질 수 없게 분단의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좀처럼 냉정해지기 어렵다.
또 한편 생각하면 그나마 뜨거운 열망마저 식어버린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통일의 길을 열어갈 것인가. 지난 세월동안 그래도 이만큼의 대화나마 이어올 수 있었던 것도 남북겨레의 통일에 대한 열망이 그 어떤 권력으로도 억누를 수 없도록 강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이 감정적으로만 치달았던 것도 아니다.
우리들은 통일을 그토록 갈망하면서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방법에 의해 이룩되어야 한다는 냉철한 인식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이는 휴전선너머의 주민들도 다를바가 없을 것이다. 통일이 아무리 절실한 과제라 해도 만약 그것이 또다시 6ㆍ25와 같은 비극을 겪지 않고서는 달성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분단된 이대로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는 적어도 평범한 사람들은 이성적이다.
남북의 겨레가 다같이 서로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을 계속적으로 부채질하는 상황에서 45년간을 살아왔고 모처럼의 대화가 실패로 끝날 때마다 양쪽은 다투어 그것을 증폭해왔음에도 이런 공동의 인식만은 허물어뜨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값진 소득이다.
그런 공통의 인식이 있기에 돌아섰던 남북은 다시 한자리에 마주 앉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러면서도 남과 북이 당국의 차원에서나 일반 국민의 차원에서나 다같이 침공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밖에는 이룰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인식을 같이 하면서도 무력침범에 대한 우려만은 끝내 버리지 못하는 이 기묘하고 우수꽝스런 이율배반이야말로 하루빨리 제거해야할 통일의 결정적 걸림돌이다.
최근 북한의 전금철 조평통부위원장은 중앙일보 이찬삼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북침을 정말로 우려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분명히 답변하고 있다. 만약 이 말이 선전적 발언이 아니라면 북의 우려도 우리 당국자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북침과 남침에 대한 우려는 비단 남북의 당국자들만이 아니라 많은 일반 국민들도 지니고 있다. 북한주민의 견해가 전체적으로 밝혀진바는 없으나 남의 경우 일반 국민들도 북의 남침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음이 숫자로 드러나고 있다.
지난 1월에 갤럽조사연구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국민의 45.1%가 「전쟁발발가능성이 있다」고 답변했고 5월에 공보처의 의뢰로 대륙연구소가 실시한 조사에서는 76.2%가 북의 남침가능성을 염려한다고 답하고 있다. 남북이 당국의 차원에서나 일반 국민의 차원에서나 평화통일을 원하는 것만은 분명하고 또 그럴 수 밖에는 없는 것이 객관적인 상황이라면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남과 북이 다같이 존재하지도 않는 남침과 북침이라는 허상때문에 평화의 길로 선뜻 나서길 주저하고 막대한 국력을 낭비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전쟁의 가능성이 단 1%만 있어도 그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국가안보의 기본개념이다.
그러나 만약 남북이 서로 허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확인시켜줄 수만 있다면 제3자가 보기에는 너무도 우스꽝스러운 「허상의 놀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모처럼의 남북총리회담은 무엇보다도 남북이 갖고 있는 「남침」과 「북침」의 우려가 허상임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이미 남과 북의 기본입장이나 통일방안은 서로가 알만큼 알고 있다. 군축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군축안도 실시의 선후 문제가 크게 엇갈릴 뿐 내용에 있어선 차이 못지않게 큰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것을 되풀이해서 상대방이 받아들일 것을 요구해 보았자 선전전에 그칠 뿐이다. 남과 북은 우선 서로가 갖고 있는 남침과 북침의 우려를 일단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그 이율배반적인 허상의 주술에서 풀려나는 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불신과 적대감을 그대로 지니고서라도 우선 자주 만나야 한다.
그리고 되도록 많이 오가야 한다.
그 자체가 바로 서로가 갖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이 허상임을 확인하는 길이다. 또 자주 오가는 자체가 남북간에 필요이상으로 쟁점이 되고 있는 신뢰구축의 지름길이 될 것이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격언처럼 불신이 깊을수록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선 많이 보아야 한다. 또 그러기 위해선 어떤 일이 있어도 대화는 이어나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북한대표단은 우선 이번 기회에라도 가능한한 많이 보고 듣고 만나고 이야기 했으면 한다.
북한대표단들은 잘 단장된 거리를 통해 회담장에 이르렀을 것이다. 호텔의 창문을 열면 54층의 무역센터와 잠실올림픽경기장,테헤란로 주변의 아파트군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것들이 남한의 전부가 아님은 물론이다.
달동네도 있고 걸인도 있다. 그러나 애써 어느쪽에 눈감을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호텔밖의 풍경도 달동네도 다같이 엄연한 남의 현실이다. 남과 북이 서로 있는 그대로를 선입견없이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허상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