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만 지원,넘어선 안될 한계(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미국 주도의 대이라크 군사봉쇄작전이 이렇다 할 외교적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은 이해당사국들에 대해 장비지원과 비용분담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이와같은 미국측 요구는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부당하다고 외면하기 어려운 논리에서 나오고 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병탄이 기정사실로 용인될 경우 세계 도처에 잠재해 있는 국가ㆍ민족간 분쟁요소들을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소영웅들이 발호할 위험이 커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서도 쿠웨이트침공이 원상회복되는 것은 모든 평화애호국가들의 절실한 요청이다.
그리고 이라크사태가 본질적으로는 석유의 공급원을 위협하고 가격체계를 교란시킬 가능성을 안고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나라의 경제적 이익과도 직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라크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유도하는 데 목적을 둔 무력시위라면 모든 이해당사국들이 이에 조력해야 된다는 주장은 무리가 없다. 또 우리나라도 그러한 이해당사국중의 하나에 포함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조력에는 어느 나라건 분명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의 경우 그 한계는 다른 서방국들에 비해 극히 좁다는 점을 미리부터 확인하고 정부는 미국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사이에 명백한 선이 그어야 할 것이다.
이 선을 그음에 있어서 첫번째 고려는 우리의 능력이다. 겨우 4년간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한 이래 우리의 무역수지는 적자로 돌아섰고 그중 가장 큰 원인은 미국 자체가 강요해온 급속한 시장개방조치에서 비롯됐다. 시장개방은 그 불가피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ㆍ경제가 민주화와 산업구조 개편이라는 내부적 변화와 일치되는 시기에 몰려왔기 때문에 우리 경제의 진로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일조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
둘째,이라크사태의 핵심부분에 있어서는 우리의 국익과 미국의 국익사이에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법이 군사 일변도여야 하느냐는 문제,장기적으로 대이라크,넓게는 대아랍권 외교에 임하는 자세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앞으로 사태가 악화되어 중동사태가 지금과 같은 이라크 대 범세계의 구도에서 아랍세계 대 미국 또는 서방과의 대결구도로 바꿔질 경우 미국이 갖고 있는 세계전략적 정책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두가지 고려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조력의 한계는 유엔의 결의에 따른 집단봉쇄조치에 적극 협조하고 미국에 제공할 것으로 알려진 수송수단과 일부 비살상용 장비 제공까지는 어쩔 수 없더라도 어떤 용도에도 전용될 수 있는 「분담금」 제공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하고자 한다.
브래디 미재무장관이 페르시아만 주둔군의 작전비용 분담금을 요구하기 위해 곧 한국을 방문하리라고 한다. 우리는 정부가 이 기회에 이상과 같은 한국의 입장을 분명히 전달하기 바란다. 정부의 어려운 입장은 십분 이해가 간다. 그러나 과거 권위주의 시대처럼 여론을 도외시하고 압력에 굴해 장기적 국익에 손상을 주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