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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고유분야』탈피 몸부림|여학생 진로고민 많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공과대학에 진학해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요. 그런데 부모님께선 이를 적극 반대합니다. 여자가 곱게 커야지 거친 남자세계에서 어울리다보면 시집가기가 힘들어진다는 거예요. 학교 선생님들께서도 적극적으로 만류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부모님의 의사에 동의하시는 편이죠.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더욱 반발감이 생겨요.』
보라매 청소년 회관 상담실을 찾은 고교2학년 여고생의 이야기다.
최근 들어 이렇게 진학이나 진로문제를 놓고 기존의 여성 고유 분야나 역할만을 강조하는 부모·교사와의 갈등으로 상담창구를 두드리는 여학생들이 늘고있다.
보라매 청소년 회관 상담실의 경우 유난히 진로문제상담이 많았던 지난 5월 총80여건의 진학상담 중 이 같은 상담사례는 20여건이나 됐다. 서울 청소년 육성회 상담실에도 지난해 89명의 여학생들이 적성검사를 받고 자신의 적성이 기존의 여성직종이나 역할에만 적당한가의 여부를 상담했다.
남학생이면 겪지 않는「여학생 고유의 문제」로 갈등하는 여학생들은 대부분『나는 인습에 얽매여 자신을 죽이고 살림만 하는 우리 엄마같이 살고싶지 않다』는 의견을 보이고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결혼을 하고 가사노동도 하겠지만 한편 변화하는 21세기에는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나도 한몫하고 싶다』는 욕구를 보이고 있다.
보라매 청소년 회관 상담실 정은 간사는『여학생들이「여자란 곱게곱게 자라서 시집이나 잘 가면 된다」는 부모의 기대를 암암리에 전달받고 이에 크게 반발심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말하며 지난해의 경우 딸만 둘인 가정의 중학교 여학생 8명이「딸둘클럽」을 조직해 집단 상담을 요청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서울 청소년 육성회 상담실 김종건 간사는『딸의 이공계 진학을 반대하는 학부모들이 의의로 많다』며 이공계는 남학생에게만 적당하다고 생각하거나, 설사 이공계에 적당한 여학생의 경우도 사회가 잘 받아주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문과계통이나 사범계, 예·체능방면을 적극 권유하는 부모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여성개발원이 지난 88년「여학생 진로교육 실태」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딸의 직업으로 전통적 여성직종, 또는 여성취향으로 간주되는 교사·예술가·간호원·경리직 등을 희망하는 부모들이 90%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아들에 대해서는 법관·공무원·과학자·사업가 등을 희망했다.
수도여고에서 고3 진학상담을 담당해온 한주석 교사는『성적이 특히 우수한 학생을 제외하고 대부분 여학생의 경우는 입학원서를 쓰는 순간 자신의 인생이 결정되는 수가 많다』며 특히『대학이란 여성에게 있어서 결혼을 위한 간판 따는 곳이라는 부모들의 고정관념이 아직까지도 심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성심여대 사회학과 이영자 교수는『대학진학 후 뒤늦게 자신의 진로문제로 갈등하는 여대생들이 많이 있다』며 『미래사회는 여성에게도 다양한 역할과 남성에게 못지 않는 활동이 기대될 것이 분명하다』고 전제하고『기성세대들이 기존의 성 역할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진취적인 여학생들의 의욕을 꺾을 것이 아니라 적극 이해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문경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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