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하영선칼럼

대선 주자와 '북핵 제재 해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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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숙제가 얼른 보면 대단히 어렵고 복잡해 보인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718호의 17개 항 내용은 깨알 같은 글씨로 A4 용지 다섯 장이나 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다. 북한이 비핵국가로 완벽하게 다시 태어날 때까지 유엔 회원국들은 합심해 두 가지 제재를 하겠다는 결의다. 핵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 미사일 같은 운반 수단, 고급 재래식 무기 등의 무역을 막고 대량살상무기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될 수 있는 돈을 막겠다는 것이다.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은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여,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이다. 우리 정부는 남북 관계와 유엔 제재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해법을 찾아보려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안타깝지만 그런 해법은 없다. 북한이 비핵화의 전략적 선택을 하지 않는 한 남북 문제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유엔 제재에 최소한으로 동참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물거품으로 끝나 버릴 것이다. 틀린 해법을 고집하면 시간만 낭비하다 낙제점 답안을 제출할 위험이 크다. 시간이 없지만 해법을 바꿔야 한다. 유엔 제재 결의를 모범적으로 준수하되 남북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PSI에 참여하되 한반도 평화를 위한 유연성 있는 적용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도 국제 수준의 투명성을 마련하지 못하면 최종적으로 살아남기 어렵다.

이번 주 외교안보팀의 전면 교체가 예정돼 있다. 그러나 청와대는 정책 기조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대통령의 전략적 결단 없이 실무 담당자를 아무리 바꿔도 정책 기조가 바뀔 가능성은 없다. 문제는 북핵 문제에 대한 국제정책 기조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안보리 제재 결의 회의의 분위기를 보면 쉽게 느낄 수 있다. 국내여론은 아직도 북한책임론과 미국책임론의 혼란에서 못 벗어나고 있지만 회의장에서 드러난 국제여론은 일방적이었다. 15 대 0의 제재 결의 후 각국의 발언 내용을 보면 제재신중론의 중국.러시아도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반면 핵실험의 책임은 북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북한 제재를 결정했다고 안보리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퇴장하는 박길연 북한 유엔대사의 뒷모습은 한없이 외로웠다.

노무현 대통령의 전략적 결단이 없는 한 북핵 문제에 대한 국내정책 기조와 국제정책 기조의 괴리는 점점 더 벌어질 것이다. 그 결과는 국가 이익에 파괴적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대통령의 결단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 때는 대통령 당선자가 사실상 대통령의 역할을 수행했다. IMF 금융위기보다 더 심각한 핵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기대 속에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하루빨리 국가의 지혜를 모아 해법을 찾아야 한다. 대통령이 할 수 없다면 차기 국정 담당을 꿈꾸는 대선 주자들이라도 나서야 할 때다. 여야의 대선 주자들은 지금처럼 북 핵실험과 제재에 대한 소박한 의견 개진의 수준을 넘어서서 본격적인 해법을 마련해 국민적 합의 기반을 창출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대통령선거는 아직 1년이나 남아 있고 정계 개편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어느 때보다 낙마를 조심해야 할 때다. 그러나 북핵 위기는 1년이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전 국민이 그리고 전 세계가 바라는 북핵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새로운 정책 기조가 필요하다. 다음 대선 주자는 국내선거에서 이겨야 하지만 그전에 국제선거에서 이겨야 살아남을 것이다.

하영선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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