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과수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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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과수원'- 이재무(1958~ )

붉고 실한 열매 꿈꾼 적이 있다

스스로의 무게 못 이겨 떨어지는,

가을의 낙과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성급한 주인은

열매의 열망 기다려주지 않는다

다 익기도 전에 가지를 떠나는

저 불그스레한 얼굴의 열매들

그들이 그렇게 떠나고 가지들은 갑자기

늙어간다 젊고 싱싱한 늦가을 햇살

과원의 슬레이트 지붕이나 달구고 있다



완숙해지기 전에 모두 따간다. 완숙해지기 전에 모두 팔아버린다. 제 실력도 제 사랑도 제 꿈도…. 다 익고 나서, 다 익히고 나서 나아가는 것, 일러 과감(果敢)하다고 한다. 다 익혀 과감히 떨어진(뜨린) 열매가 온전한 새 생명이다. 열매 떨어뜨린 과원의 가지 하늘로 가뿐히 추켜올라가 아무 미련 없을 때 비로소 거룩한 것! 늦된 것만 겨우 서리 아래 여문다. 장하다.

<장석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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