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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선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어렸을 때부터 산·바다들과 친구가 돼 이제 이곳을 떠나면 불안해 못 살 것 같습니다. 고향을 떠나 다른데 가 살만큼 제 마음이 모질지 못함을 늘 느끼고 있습니다.』
끝내 수복되지 못하고 휴전선 바로 너머 있는 고향 마을에 가장 가까이 있기 위해 속초를 지키고 있는 고성 출신 시인 이성선씨 (49). 그러나 이씨의 시를 들여다보면 그가 속초를 못 떠나는 것은 산과 들·바다, 그리고 초목과 별 등의 대 자연이 이미 그의 친구며, 애인이며 신이 되어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술에서 깨어나 보니 내기/산의 사타구니/가랭이 베고 누웠구나/아랫도리 단추 모두 풀린 상태로/어젯밤 누구에게 유괴되어/만취로 이 모양이냐//정신을 차리고 비척비척 일어나니/내 몸 아래 밤내 깔린/쑥대, 곰취, 미나리 아재비//아, 나였구나/산 목련 향기에 흘려 마시고 또 마시고/이 골짜기에 와 쓰러져//산 하나 여자로/몰래 껴안고/새벽까지 잔 남자.』(「산을 껴안고」전문)
이씨에게 운악산은, 설악산이 품고 있는 모든 것은 애인이다. 『부끄럽게 솟아오른 봉우리에서/아래 깊숙한 곳으로/숨죽여 물결쳐 내리는 그녀의 능선/뜨겁게 나를 이끌어』 『온통 신음하며 이상한 소리』 (「우중 산행」중)를 내는 살아 있는 여체다. 그가 태어나고 더불어 살다 돌아가야 할 우주의 자궁이다.
대체 얼마만큼 산을 바라고 산에 살아야 바위마저 더 불고 갈 수 있는 여자로 느껴질 수 있을까.
『해가 가장 빨리 뜨고 지면 별 빛이 아니라 별 자체가 쏟아져 내리는 곳, 높은 산, 바다의 심연, 무한한 바다의 에너지와 그윽한 산 계곡, 바다와 산이 남녀 양성을 교환하며 속초의 자연 환경이 내 시 세계를 이끌고 있습니다. 나는 그저 눈뜨고 귀 열고 그러한 우주를 보고들을 뿐입니다.』
무위자연의 노장 사상에 취해서인지 이씨는 자연이 시를 이끄는 이렇게 좋은 환경을 두고 어떻게 속초를 떠날 수 있느냐며 대학에서 강의를 맡으라는 것도 뿌리쳤다. 산업화로 인한 복잡다단한 생활 중 폭력적으로 변한 인간의 심성을 높은 기상·고요함·포용성 등을 지닌 산이 혹시 구원해 줄까해 연작 「산시」를 구상 중이라는 이씨는 70년 시단에 데뷔한 이래 『하늘 문을 두드리며』 『나의 나무가 너의 나무에게』 『새벽 꽃향기』 등 7권의 시집을 냈으며 양양 고등학교에 재직중이다.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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