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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우월감 가져선 통일 멀다/유승삼(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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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는 올해 8ㆍ15를 그 어느 해보다 착잡하고 서글픈 심정속에서 보냈다. 어쩌면 5년 만에 다시 남북교류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한가닥 기대도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한 외지로부터는 「범민족대회」와 「민족대교류」라는 남북당국간의 제의및 맞제의가 하나의 「PR게임」에 지나지 않았다는 혹평까지 받았다.
외지로부터의 이런 혹평은 우선 민족적인 감정에서의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런 평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당국에만 있는 것일까. 현실성있고 자신감있는 통일정책의 추진과 성과는 서독의 예에서 보듯 단단한 내부적 기반이 다져져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이 내부적 기반이란 단지 물질적 조건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분단된 양쪽의 주민들이 통일에 아무런 심리적 거리낌도 느끼지 않을 정신적 바탕도 아울러 요구한다. 어느 한 쪽의 주민이든지 통일후의 사회상에 대해 밝은 전망보다 불안이나 회의를 더 느낀다면 순조로운 통일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서독의 동독 흡수통합이 가능해진 주된 원인이 경제적이 요인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만약 서독이 동독주민들에게 통독후의 미래상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심어주지 못했더라면 통일의 길이 그렇게 순탄했겠는가.
최근 보도에 따르면 백두산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이 밀어닥치면서 그 길목인 연길시에는 한국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서울식 가라오케가 서너군데나 문을 열었다고 한다.
서울의 밤문화가 이식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일부 한국 관광객들은 주머니에 돈푼이나 있다고 안하무인이 돼서 호텔에선 밤 늦게까지 술에 취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비행기를 타고서는 『짱꼴라냄새가 난다』며 희희덕거리는가 하면 금연규정을 지키지 않아 승무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등 추태를 벌이는 경우도 적지않다고 한다.
보다 못한 한 중국동포가 했다는 『고국에서도 이렇게들 삽니까』라는 개탄섞인 항변에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이를 특정 몇몇 개인들에 국한된 행태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퇴폐문화,조그만 경제적 성취에 들떠 오랫동안 쌓인 열등감을 해소해보려는 일부 층의 서글픈 과시욕,금전만능의 물신주의,각박한 경쟁속에서 체득한 극단적인 이기주의등등 우리 사회 부정적 측면의 투영이라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과연 우리 사회가 이런 병폐를 그대로 지닌 채 통일의 길로 나갈 수 있을 것인가. 또 통일이 된다 해도 그 통일이 현재 우리 사회의 부정적 양상과 행태를 한반도 전체로 확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통일이 민족의 번영에 과연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대해서도 깊은 성찰이 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 사회가 그러한 내부적 병폐를 하루빨리 제거하지 않고,그래서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병든 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그 자체가 바로 통일을 가로막는 결정적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대로 접촉이 확대될 경우 북한주민들도 중국동포들이 느낀 이질감과 환멸감,그리고 모욕감을 느낄 것이고 그에따라 무조건적인 통일에는 심리적 거부감마저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자기반성은 커녕 소련이나 동구를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는 그 곳에서 접촉한 몇몇 사람들의 달러에 대한 비굴한 태도나 뇌물수수등의 경험담을 무슨 무용담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점이다.
여기에는 스스로의 부끄럽고 어두운 곳을 합리화하고 안도하려는 얄팍한 보상심리가 깔려 있다.
일부 사람들은 한술 더 떠서 사회주의권의 경제적 파탄을 이윤동기가 없었던 탓이라고 간단히 진단하고 마치 그 이윤동기가 인간의 어쩔수 없는 본성이라는 비약적인 논리까지 서슴지 않고 제시하기도 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무한경쟁속에서 체질화된 극단적 이기주의의 합리화요 자기변명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규정이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현대자본주의는 마르크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이 있듯이 현재 서구사회가 동구사회를 압도하게 된 주요원인의 하나는 사회주의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여 스스로 사회주의적 요소를 과감히 체제내에 수용하고 부단히 체질을 개선해나온 데 있다.
서독의 동독에 대한 승리는 사회주의 국가에 못지않은 복지경제체제를 갖추고 거기에 더해 완성에 가까운 의회민주주의를 확립함으로써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을 동독국민들에게도 제시할 수 있었던 데 있다.
그런 서독을 본받음이 없이 그저 서독의 승리를 마치 우리 사회가 승리한 것으로 착각하는 한 우리 사회의 병폐와 모순은 제거되기 어려울 것이고 통일의 기반도 다져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서구로부터 뿐 아니라 사회주의의 원형적인 이상으로부터도 배울 것이 많다. 경쟁의 장점을 활용하고 노동에 적절한 유인을 부여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나 거기에는 개인의 행복과 공동선의 적절한 조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기주의가 과도하게 팽배해 있고 경쟁이 필요이상으로 강조되는 우리 사회의 실정에 비추어볼 때 다수가 공감하고 승복할 수 있는 사회통합원리의 확립을 위해선 오히려 이타주의ㆍ공동선과 공동체의 원리는 의도적으로라도 강조될 필요가 있다.
허황된 우월감은 자칫 이 탈이념의 시대에 낡은 냉전적 사고방식을 강화시켜 통일을 더욱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우리들이 부단한 체질개선으로 북한주민들도 동경할 수 있는 사회상을 제시할 수 있을 때 평화적 통일은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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