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병대 조직 항일 앞장|「창의 동맹단」결성 이원영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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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일제 때 의병출신으로 해방 후 전주 건지산에 황극단을 쌓아 순국 열사비를 세우는 등 나라 걱정 속에 한평생을 살다간 고 이원영(83년 12월 28일 작고) 항일투사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15일 8·15 45주년 기념식장에서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고 이씨는 또 호남창의 동맹단 의병대장 출신으로 62년 3월 1일 역시 독립유공자로 건국 공로 훈장을 받은 고 이석용 장군의 외아들로 의병대 출신 2대가 독립유공자가 됐다.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의 독립유공 인정은 가문의 큰 영광입니다만 우리 집안보다 공이 큰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1899년 5월 14일 전북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 도화동 마을에서 3대 독자 의병대장 이석용 장군(당시 21세)의 외아들로 출생한 고 이씨는 9세 때 벌써 선친이 전북 진안의 마이산에서 28의사와 더불어 호남창의동맹단이라는 의병대를 조직, 3백여 명의 이 고장 출신 의병을 모아 진안 등 도내 산간지역에서 왜군들과 치열한 전투를 할 때 의병대의 잔심부름을 하며 항일 광수장군의 맏딸인 동갑내기 「효」와 결혼, 장인으로부터 비밀문서와 군자금을 받아 아버지에게 전달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고 이씨는 1935년 일제가 쉽사리 패망치 않자 선친 생가 앞 빈터에 유허비를 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붙들려 전주 교도소에 투옥, 2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또 석방된 후 마을 산에서 소를 잡아 일제 패망을 기원하는 고천제를 지내는 등 헌 갓과 흰 두루마기·행건을 두른 채 자신과 자녀들의 호적을 올리지 않은 것은 물론, 자식들을 일인에게 맡길 수 없다며 학교조차 보내지 않았던 일도 남긴 일화 중의 하나.
해방을 맞아 부인이 바느질 품삯으로 마련한 논밭 4천평을 판 돈에다가 5년 동안 부부가 전국을 돌며 요강을 팔아 번 돈을 보태 1957년 음력 5월 5일(단오절) 전주시 덕률동 건지산 중턱에 황극단을 낳아 순국열사 3백 명의 이름을 새긴 비를 세웠다. 그는 이어 손병희 선생 등 민족대표 33인의 위명을 담은 비, 안중근 등 5열사비, 백범 김구 선생 비, 선친 및 28의사 비를 세우는 한편 같은 해 임실군 성수면 양지리에 선친과 28의사의 위패를 모은 사당 소충사를 지어 해마다 음력 칠월 칠석 때 위령제를 지내는 등 백의종군하다 83년 85세 때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임실=현석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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