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감고 귀막고 입열면 "규제"

중앙일보

입력

기업인은 답답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단체들은 1년 내내 규제완화를 외쳤다. 정부를 상대로 윽박도 지르고 하소연도 했다. 그러나 정부의 대답은 '모르쇠'다. 기업의 목소리에 귀를 막은 것 같다.

투자 활로는 열어주지 않으면서 일자리를 늘리라고 한다. 비정규직도 없애라고 요구하고 있다. 정부의 독촉에 사회공헌비용만 잔뜩 쏟아내야 한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고 내놓은 상법 개정안은 오히려 기업들을 옥죄고 있다.

답답한 마음에 해외로 뜨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이제는 기업들의 기(氣)를 살려줘야 한다. 최소한 기업에 도움이 되는 정책의 '신호'라도 보여달라는 게 기업인들의 호소다. 출자총액제한제도, 수도권 규제, 상법개정안 등을 전면 재검토해야 기업이 살고 경제도 산다는 것이다.

기업들이 가장 문제시 삼는 규제는 출자총액제한제도다. 기업이 투자할 수 있는 한도를 법으로 막아놓은게 출총제다. 세계어디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출총제 덕에 투자할 곳에 제때 투자를 못하는게 다반사고 외국기업과 합작도 수월치 않다.

정부 일각에서도 이런 문제를 알고 출총제 폐지를 검토했으나 공정거래위원회는 순환출자 규제와 지주회사 전환이라는 더 큰 규제를 들고 나왔다. 문어발식 확장을 막겠다는 출총제가 지금은 기업들의 손발을 묶고 있다.

◇ 출총제 무엇이 문제인가

출자총액제한제도는 공정거래법상 한 기업이 다른 회사의 주식을 매입해 보유할 수 있는 총액을 제한하는 제도다.

재벌그룹이 다른 회사를 무분별하게 인수하는 것을 막기 위한 취지다. 지난 1987년 도입돼 4000억원의 자산을 가진 기업은 자산의 40%까지만 투자를 할 수 있게 규제했다. 지난 1998년 폐지됐으나 2001년 재도입되면서 자산 5조원 이상인 기업은 순자산의 25%까지 투자할 수 있도록 했다.

전경련이 조사한 결과 5개 그룹의 자산총액은 출총제의 제한 규제만큼 2001년 들어 5조원으로 수렴됐다. 한 대기업은 1998년에 7조원까지 자산을 키웠으나 2001년 들어 5조원으로 줄였다. 2005년 들어 자산 상한선이 6조원으로 재조정되자 5대 그룹의 자산은 6조원에 수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림) 출총제가 기업들의 정상적인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방증이다.

◇기업 투자가 막힌다

출총제로 기업들의 개별 투자도 막히고 있다. G그룹의 경우 LNG발전, 생명 연구소 등을 진출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했다. 그러나 출총제가 발목을 잡았다. S그룹의 경우 외국 기업과의 합작이 막히기도 했다. 자동차 수입업을 위해 딜러계약까지 체결했으나 출총제의 벽을 넘지 못했다.

결국 딜러 계약 해지에 손해배상까지 해야 했다. D그룹의 경우 외자기업과 합작을 통해 의료산업에 1조5000억원을 투자키로 했다. 그러나 출총제 규제로 설비 확장 계획을 보류하고 있다.

이외에 협력업체와의 지분 공유를 통해 지원 확대 등도 출총제에 막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까지 출총제에 따른 유무형의 손실을 입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의 성장을 제한하는 대표적인 악성 규제중 하나다"며 "기업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인위적으로 막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꼬집었다.

◇순환출자.지주회사 전환은 더 큰 규제

정부도 이같은 출총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 출총제를 폐지하자는 취지로 시장선진화 태스크포스(TF)팀 회의를 만든 것도 이같은 이유다. 그러나 24일 마무리된 TF팀 회의는 출총제를 대신해 더 큰 규제를 들고 나왔다.

환상형 순환출자 규제와 지주회사 전환 유도로 기업들을 더욱 옥죄려 하고 있다. 순환출자규제는 A→B→C→A 식으로 계열사간 상호 출자를 통해 지분을 확보하는 환상형 순환출자를 막겠다는 취지다. 대기업 오너가 적은 소유권을 갖고 대그룹을 장악하는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게 요지다.

순환출자구조를 띤 대표적인 기업은 삼성, 한진, 롯데, 동부, 현대차그룹 등이다. 경제계는 순환출자를 직접 규제할 경우 M&A위험에 노출돼 불확실성을 키우게 된다고 지적한다. 투자에 들여야 할 자원을 M&A방어를 위해 써야 한다는 이유다.

예를 들어 현대차그룹의 경우 현대모비스와 현대제철이 보유한 현대자동차 지분은 26.5%에 달한다. 그러나 순환출자 규제가 이뤄지면 의결권은 5.5%로 하락하게 된다. 2대 주주인 캐피탈그룹의 지분 5.9%에 비해 낮다.

SK그룹의 경우 SKC&C가 보유한 SK지분이 축소돼 취약한 지배구조를 띠게 된다. SK의 내부지분율은 13.2%에서 1.9%로 하락해 제2의 소버린사태를 야기할 수 있다.

삼성전자도 마찬가지다. 삼성물산과 삼성화재 등이 보유한 내부지분이 17.1%에서 11.5%로 하락해 씨티뱅크 10.5%와 비슷한 수준이 된다. 우리나라 대표기업도 M&A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공정위는 출총제의 또 다른 대안으로 지주회사 전환을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주회사 전환은 막대한 자금이 소요된다. 순환 출자 뿐 아니라 수평계열사간 출자까지 해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대규모로 주식을 처분할 경우 주식시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고, 비상장 주식을 평가하는 문제도 수월치 않다.

◇세계 유일의 제도

출총제나 순환출자 규제등은 전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제도다. 일본의 경우도 2002년 독점금지법을 개정해 주식보유총액제도를 폐지했다.

대규모 회사는 자본금이 350억엔이거나 순자산이 1400억엔 이상인 경우 타법인 주식 취득을 제한하는 제도다. 자본금이나 순자산액중 큰 쪽을 초과할 수 없다고 돼 있다. 우리나라 출총제보다 완화된 규정이었으나 이마저도 기업 투자에 방해가 된다고 폐지했다.

일본은 이 제도가 폐지된 2003년 이후 본격적인 경제 회복이 가능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기업마다 역사와 사정이 전혀 다른데 하나의 잣대로 지배구조를 바꾸라던가 투자범위를 제한하는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다"고 꼬집었다.

<머니투데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