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인과 국지전 「판도라상자」/장두성(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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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32년 여름 포츠담 근교에 살고 있던 아인슈타인박사는 빈에 살고 있던 프로이트에게 한통의 편지를 보냈다. 아인슈타인은 이 글에서 인류를 전쟁의 재앙으로부터 구할 길은 없겠는가라는 기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유럽정치인들은 그때 1차대전을 겪고난 후의 절망감속에서 국제연맹 창설안을 놓고 파리에서 회의를 열고 있었다.
따라서 당대의 으뜸가는 과학자이며 지성인으로서 그가 인성의 가장 깊숙한 내면세계의 신비를 연구하고 있던 프로이트에게 그와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이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이 특히 관심을 보인 대상은 인간의 심성속에는 증오와 파괴의 본능이 숨겨져 있어 평소에는 의식의 밑바닥에 감춰져 있다가 「특수한 환경」이 조성되면 이 본능이 집단심리로 폭발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었다.
프로이트는 이에 대한 답신에서 아인슈타인이 제기한 인간의 파괴본능에 동의하면서 인간의 문화적 본능과 앞으로 다가올 전쟁의 참상에 대한 공포심만이 미래의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피력했다.
돌이켜 보면 당대의 두 지식인이 보인 전쟁방지에 대한 관심은 그 자체로서도 의미가 있는 것이었지만 이때 이미 수백만명의 목숨과 무수한 도시의 파괴를 가져올 2차세계대전의 씨앗은 자라나고 있었던 점에 비추어 절박한 것이었다.
이들이 경계한 파괴와 증오의 집단적 본능은 히틀러의 개인적 야망을 씨앗으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2차대전이 세계의 대부분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다음,미소의 핵무기 개발로 이른바 「공포의 균형」이 이루어져 불안정한대로 세계단위의 평화는 45년간 유지되었다. 프로이트가 지적한 전쟁의 참상에 대한 공포심이 실제로 3차대전을 예방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강대국간의 불안정한 평화속에서도 국지전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국제연맹의 후신으로 유엔이 창설되고 집단안보체제가 미국주도로 형성되었지만 지역분쟁은 걸핏하면 열전으로 터져 나왔다.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가 제기한 기본적 전쟁예방문제는 현실세계에서 조금도 해답을 얻지 못한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대로 대물림 된 것이다.
지금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불씨는 당장 우리에게 제3의 석유위기를 몰고 올지 모른다는 우려뿐 아니라 모처럼 마련된 강대국간의 평화공존 분위기가 과연 세계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냐,아니면 국지전의 남발을 더 쉽게 만드는 조건이 되는냐는 테스트로서 더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인류를 멸망의 길로 몰아넣을 핵전쟁의 가능성이 줄어든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일이다. 고르바초프의 「신사고」에서 비롯된 냉전의 해소는 공멸의 위기앞에서 레닌이 제시했던 제국주의론과 무한전쟁의 가설은 더 이상 타당성이 없다는 고르바초프의 판단에서 추진되어 온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미래 전쟁에 대한 공포심 이상으로 앞으로 강대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승자고 패자고 간에 모두 멸망하게 된다는 절망감이 강대국사이에 평화공존만이 살길이라는 선택을 강요한 것이다.
그러나 국지전의 경우는 이를 막아줄만한 그런 수준의 절망감이 없다. 사담 후세인은 지금 히틀러가 처음 시작했던 것과 너무나 흡사한 의도와 방식으로 중동의 패자가 되려하고 있다. 폭력과 광신이 합쳐지면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세계는 2차대전에서 체험했다. 우리도 한국전을 통해 그것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중동에서는 호메이니에게서 그런 무서운 결합을 보았고 지금은 사담 후세인에게서 그것을 보고 있다.
호메이니가 종교적 광신과 서방세계에 대한 증오심으로 이슬람세계에 혁명을 몰고 오려했던 것과 마찬가지 강도로 지금 후세인은 바트 사회주의라는 세속적 광신으로 이슬람 세계를 총동원하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노리고 있는 것은 중동의 패자자리를 굳힌 후 석유값을 마음대로 조정하고 석유수입을 자신의 의도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그는 아랍세계에 잠복해 있는 증오와 파괴의 본능을 동원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위협을 받고 있는 사우디는 물론이고 이집트나 시리아 등 중동의 맹주로 자처하는 군사강국까지도 후세인의 모험주의에 대해 엉거주춤한 기회주의로 대응하고 있는 것은 후세인의 그런 야망이 무시못할 정도의 실현성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후세인의 모험이 어떤 형식으로 결말이 나느냐는 세계도처에 널려 있는 분쟁지역주민 모두의 중요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만약 그의 뜻대로 패권장악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질 때 강대국의 양분 구도 아래서 그런대로 억제되어온 지역분쟁속에서 또다른 모험주의자들이 고개를 들 가능성은 커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가 다시 강대국 지배체제로 돌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도,가능하지도 않지만 그보다 한차원 높은 세계 안보기구,즉 유엔의 활성화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무력이 분쟁해결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범세계인의 「문명화된 본능」이 국제관계의 규범으로 정착되어 강대국의 힘에 의한 개입을 대신해서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도록 바라는 것은 아직은 지나친 낙관주의일까.<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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