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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본영-굴 곳곳에 사경 헤맨 한인 낙서|외대 조사팀 18명 송대 현지를 가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강제 징용된 한인 노무자가 죽어간 「일본의 아우슈비츠」 마쓰시로 (송대) 대본영에 대한 베일이 우리 나라 탐사반에 의해 벗겨졌다. 한국외국어대 박창희 교수 (사학과)와 대학원생·대학생 등 18명으로 구성된 「마쓰시로 대본영 조사 연구회」는 6월29일부터 7박8일간 현지를 답사한 후 최근 보고서를 발간, 일본측도 치부라며 비밀로 해오던 마쓰시로 대본영의 정체를 밝혀냈다. 마쓰시로 대본영은 일제가 2차 대전 말기인 44년11월부터 45년8월 해방 때까지 구축한 대규모 지하호로 일왕과 그가 지휘하는 육·해·공군 최고 사령부가 대피소로 쓰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일본은 44년7월 사이판섬이 함락되고 미군의 공습이 본격화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이곳에 지하호를 만들었었다.
일본 내에서조차 잘 알려지지 않고 있던 마쓰시로 대본영이 처음 알려진 것은 86년.
대본영이 위치한 장야시의 시노노이 아시히고교 향토반 학생들이 처음으로 탐사해 발표할 때까지는 그저 믿기지 않는 소문에 불과했었다.
국내에서는 금년 4월 박 교수의 탐사로 처음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조사반에 의한 본격 탐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위치=동경에서 북서쪽 6백㎞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전략적으로 일본 본토 중 가장 폭이 넓은 지대인데다 가까운 곳에 비행장이 있으며 지질적으로 지하도를 파기에 좋고 지형적으로 미군의 전파 감시를 피하기 쉬워 선정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규모는 3개의 야산에 총 연장 13㎞이며 폭3m·높이 3m의 땅굴이 바둑판처럼 뚫려 75%쯤 완성된 상태다.
용도별로는 야산별로 ▲일왕의 거처와 참모사령부 본부로 쓸 무학산 지하호 ▲내각과 언론사가 입주할 상산 지하호 ▲군수 창고로 쓰기 위한 개신산 지하호로 되어 있으며 이들은 삼각골로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이 공사에는 7천∼1만여명의 한인 노무자들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조사반은 이들의 명단을 찾는데 실패했다.
◇무학산 지하호=지하 통로로 들어가는 입구에 일왕의 거처가 있었다. 일왕 거처는 10평 규모의 다다미방이었다. 미국의 공습이 있을 때 가끔 이곳으로 피난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 학계의 자료를 보면 일왕의 임시 거처 공사에 동원됐던 한인 노무자들은 공사가 끝나고 난 뒤 등뒤로 수갑이 채워진 채 어딘가로 끌려갔는데 인근 산 속에서 총살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군들은 일왕이 이곳에 머문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려했다.
일왕 거처를 지나 지하로 내려가자 지하호가 나타났다.
높이 3m·폭 4m 가량의 지하호는 단단하기로 유명한 화강암 지대로 바위 속을 수㎞ 뚫고 들어가 건설되어 난공사임을 알 수 있었다.
무학산 지하호도 상산과 마찬가지로 바둑판 모양의 미로형을 하고 있었다.
입구에서 5백m쯤 들어갔을 때 벽에 흰 페인트로 한인 노무자의 낙서가 쓰여져 있었다.
「재미 구문 1945 군대호노도 너어모도 하본」
뜻 모를 이 낙서에서 징용 당해 끌려왔던 한인 노무자의 고독과 슬픔이 흘러나왔다.
입구에서 6백∼7백m 되는 지점에 일본 지진 관측소가 있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일본은 안전하고 온도·습기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이곳을 지진 관측소로 일찌감치 사용해왔다고 한다.
◇상산 지하호=입구는 가까이 가서도 못 찾을 만큼 숲과 나무 등으로 철저히 위장돼 있었다. 입구의 크기는 높이 2m·폭 2m정도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공간이 넓어지기 시작, 높이 3m·폭 3m의 굴이 끝까지 계속됐다.
지하호 바닥에는 흙차를 실어 나르기 위해 설치 된 협궤의 흔적이 두줄로 나있었고 중간 중간에는 돌이 무너져내려 있었다.
또 벽 곳곳에는 다이너마이트를 장착하기 위해 뚫은 구멍이 있었다.
수십 m마다 네거리가 생겨 전체적으로 볼 때 지하호의 형태는 바둑판 모양의 미로형이었다.
◇증언=조사단은 당시 이곳에서 노무자로 일했던 교포 최태소씨 (68)를 만나 다음과 같은 증언을 들었다.
『44년11월부터 45년8월 해방 직전까지 단순 노무자로 일했다. 45년8월15일까지도 대본영공사라는 소리를 못 듣고 큰 방공호만 만드는 줄 알았다.
보통 아침 5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며 작업 시간 중 휴식이란 없었다. 음식도 콩과 쌀의 비율이 7대 3으로 나왔으며 무 몇조각이 반찬의 전부였다.
단순 노무자들은 거의 모두가 조선인들이었다. 위험한 작업인 다이너마이트 폭파 작업엔 1백% 조선인들이 동원됐고 하루에 4∼5명씩 죽어나갔다.
막장에서 죽은 사람은 흙차에 실려 나와 흙과 함께 아무데다 버려졌다. 또 일본 감독에 반항한 사람들은 조용히 사무실로 불려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50, 60대 한국인들은 체력을 이기지 못하고 영양실조에 걸려 대부분 죽었다.
또 조선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했는데 어쩌다 신음 소리로 외마디 우리말을 써도 심한 매질을 당했다.』
◇결론=개신산 지하호는 붕괴 위험이 있어 조사가 불가능했지만 무학산·상산 지하호의 조사 결과로 미뤄 그곳에서도 한인 노무자가 혹사당했다는 것은 미뤄 짐작이 가능했다.
결국 마쓰시로 대본영공사는 일왕에 의해 일왕을 위해 계획됐다고 보여지기 때문에 「일왕의 전쟁 책임론」이 다시 거론될 수밖에 없다.
조사팀은 한인 노무자의 희생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본 각 행정 기관에 당시 이곳 공사에 강제 징용됐던 한인 노무자의 명단 공개를 요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본 당국은 한결같이 『징용된 노무자 명단은 갖고 있지 않다』는 한마디로 거절했으며 협조할 뜻이 없는 것으로 보여졌다.
다만 몇몇 일본인들이 이 대본영에 대한 조사 연구를 활발히 시작하고 있어 기대를 걸어 볼만하다.
조사단이 만난 장야 시장은 이곳을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의도를 보여 자칫 혹독한 작업에 희생된 우리 조상들의 억울함이 미화되어 버릴지도 모를 우려가 있다. <이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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