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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2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정태식ㆍ채항석 부부도 체포/“당신 혼자만 남았다” 소식에 눈앞이 캄캄
변귀현이 R에게 접근해 말을 건네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한길을 건너 경학원쪽으로 뛰었다. 혜화동을 거쳐 삼선교로 나왔는데 마침 전차가 출발하려는 찰나였다. 출발하는 전차에 나는 몸을 날려 올라탔다.
내가 맨 나중에 겨우 뛰어 탔으니 미행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다시 한번 더 확인하기 위해 그 다음 정거장에서 전차가 발차할 때 이번에는 맨나중에 뛰어내렸다.
내 뒤에 전차에서 뛰어내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비로소 안심해 골목길을 택해 안암동 나의 아지트로 아무탈 없이 돌아왔다. 변귀현의 무사성공을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 이튿날 4월5일 오전 9시 나의 비서를 정태식의 연락원 R와의 안전확인선인 돈암동 개천둑길에 내보냈다. 그런데 R가 안전확인선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어제 그때 R가 체포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어제 그 현장에서 R가 체포되었더라도 당장 자백할리는 없고 R가 정태식 아지트에 결과를 보고하러 가지 않았다면 정이 사고로 알고 피했겠지 하고 자기위안도 해보았다. 12시에 R와의 두번째 안전확인선이 있었다. 나의 비서가 그곳에 다녀와서 역시 R가 나오지 않았더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확실히 사고가 난것이라고 단정했다.
나는 곧 산업은행의 채항석에게 연락,그를 만나려 했으나 그날은 마침 노는 날이었다.
그 다음날 4월6일 아침에 나 자신이 안전확인선에 직접 나가봤다. R가 잡혔다면 정태식이 나에게 연락하려고 누군가 내보내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길로 나는 바로 을지로 입구의 산업은행으로 갔다.
2층 채항석의 사무실로 바로 들어가 봤으나 계리부장의 큰 테이블과 의자는 비어있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계리부장은 아직 안나왔다고 했다.
『정말 큰일 났구나. 전부 다 잡혔구나』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한군데 꼭 알아볼 데가 더 있었다. 채항석부인 장병민의 고향 친구집이 생각났다. 대구여자로 대학교수 부인이었다.
언젠가 채부인과 같이 그 대학교수부인 집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그 부인을 만나 소개를 받아 인사한 일이 있었다.
그 부인의 친정동생도 남로당원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여자집 대문을 가만히 밀고 들어가니 마침 축담에 있던 교수부인이 대문여는 소리를 듣고 나왔다.
『아이구 김선생님(나의 가명) 큰일 났어요. 그저께 밤에 정선생과 채씨 부부내외가 전부 잡혀갔습니다. 지금 김선생 하나만 잡으며 다 된다고 서울시내 형사대가 쫙 깔렸대요. 낯이 희고 곱상스럽게 생기고 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면 다 잡아간대요. 그런데 김선생님,이렇게 나다녀도 됩니까』하며 물었다.
『겁이 나면 이런 일을 하고 다니겠습니까. 대단히 감사합니다』하고 나는 그 집 문앞을 떠났다.
일은 다 틀렸다. 결국 다 잡히고 말았다. 이 일을 어떻게 할까. 나는 아지트에 돌아가서 갑자기 높은 열로 드러눕고 말았다.
그 이튿날 눈을 떠보니 아지트를 지키는 아주머니와 나의 누이동생으로 가장하고 있는 비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무슨 헛소리를 하던가요』하고 물으니 『무슨 말인지 몰라도 전쟁이 일어난다,전쟁이 일어난다 하셨어요』하며 나의 비서가 내 이마위의 물수건을 갈아주었다.
『염려마시오. 하늘이 무너져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아날 구멍은 생기는 법이오』하고 나는 그녀들을 오히려 격려해 주었다.
나는 정태식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하부동지들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론진 부장 신진균,부부장 정해진,선전부장 최모등은 경찰서 고문이니 유치장 신세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사기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론진 핵심간부인 한관영을 만나 이 문제를 의논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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