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 새 인물 없이 새 政治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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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한국의 정치 지도세력이 급격한 붕괴 과정에 빠져든 것 같다. 도덕성 파탄으로 치명적 내상을 입어 지금 모습으로는 존립이 어려운 형편이다. 대통령부터 측근 비리혐의로 도덕적 신뢰의 밑천에 적신호가 왔음을 시인했다. 정치권은 여야 할 것 없이 불법 선거자금과 부패로 성한 사람이 누군가 할 지경이 됐다. 이대로는 국민을 지도할 면목도 권위도 없다. 자기들이 법을 어겨 놓고 무슨 낯으로 국민에게 법을 지키라고 할 수 있을까.

*** 붕괴 위기 직면한 기성 정치권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정치 지도세력은 형사 피의자 또는 잠재적 피의자 집단이다. 털면 안 걸릴 사람이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다. 노무현 대통령도 최도술씨 사건과 관련해 혐의를 받게 될지 모른다. 이회창씨 역시 최돈웅씨 사건으로 피의자가 될는지 모른다. 불법 선거자금을 만들고 집행한 정당의 간부, 그 돈을 받아 쓴 국회의원들도 피의자나 잠재적 피의자를 면하기 어렵다.

뿐인가. 그밖에도 수많은 정치인이 현대. SK. 나라종금. 굿모닝시티... 등 이름도 다 기억하기 어려운 부패 사건의 피의자가 돼 있다. 한마디로 정치권은 지금 '황성 옛터'가 돼 버렸다. 폐허가 된 것이다. 노래 속의 황성 옛터엔 비감한 애국심이 있지만 정치권의 그 곳엔 악취만 진동할 뿐이다. 현대. SK의 비자금만으로도 정치권은 벌써 쑥대밭이 됐는데 선거자금을 댄 다른 기업은 없을까. 검찰이 하나 깔 때마다 정치권은 초죽음이 되는데 앞으로 몇 번 더 죽을 고비가 남았나.

더 이상 이대로 갈 수는 없다. 무너진 정치권을 새로 일으켜세우고 한국의 정치 지도세력을 재형성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됐다. 이제사 정치권에선 과거를 고해성사하고 정치개혁도 빨리 하자는 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아무리 고해성사를 하고 정치개혁을 하더라도 그 주체는 같은 사람, 같은 정당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고 정당도 그대로면서 전과 다른 정치, 새 정치가 나올 수 있을까. 얼굴에 부패 딱지가 붙은 사람들이 몇달 후 마치 崔씨 사건 같은 것은 없었다는 듯 다시 총선에 나서 애국애족이니, 깨끗한 정치니 하고 떠들어서야 그런 정치에 신뢰가 가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고 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 문제다. 정치권에서 사람이 바뀌어야 정치가 바뀐다. 정치인이 바뀌고 정당 모습이 달라져야 전과 다른 정치, 새 정치가 나올 수 있다. 각 정당이 왜 외부 인사 영입을 추진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자기들로선 검찰 수사에도 견딜 수 없고 국민 신뢰도 받지 못하는 터에 당연히 외부 인사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과거 선거철 3金의 '병력 교체' 같은 방식이 아니라 정당의 체질.이미지를 바꾸고 새롭게 하는 물갈이를 단행해야 한다.

그러자면 지도자-수뇌급부터 영입해 그들의 지도 아래 새 정당.새 정치를 추진해야 할 것이다. 흔히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왜 사람이 없겠는가. 지금 정치권엔 '사람'이 많아서 요 모양 요 꼴인가. 각 분야엔 성실하게 살아오며 신망을 쌓은 사람이 많다. 정치권의 정성이 부족하고 판이 하도 더러우니 외면할 뿐이다. 특히 야당으로선 대안 인물이 없어 국민투표를 망설이는 형편이면서도 당수감.후보감을 영입할 생각은 않고 있다.

과거 제1 야당이 유진오(兪鎭午)씨를 후보로 영입했듯이 새 인물 영입→새 정당으로의 탈바꿈을 절박하게 모색할 때다. 정치권에는 지금 스타가 없다. 두 번이나 대선에서 실패하고서도 야당에선 '40대 기수론' 하나 나오지 않는 한심한 상태다. 양심적인 야심가들이 나서 남보다 먼저 깃발을 꽂을 때다.

*** 과감한 영입, 새 모습 모색해야

이런 물갈이 작업과 함께 정치권이 할 일은 자체 숙정이다. 저질.무능.아첨.부패 요소를 과감히 털어내야 한다. 새 인물 영입과 함께 지도부는 2선 후퇴를 선언해야 한다. 제도 개혁도 물론 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이 안 바뀌면 개혁해 봐야 헛일이다. 가령 정치자금을 투명하게 하자고 수표 사용을 의무화해 봤자 지하실에서 현금뭉치가 오가면 무슨 소용인가.

최도술.최돈웅씨 사건은 터진 게 그나마 다행이다. 그냥 묻혀 없는 듯 넘어갔다면 더 큰 절망 아닌가. 이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정치가 한 걸음씩 발전한다고 생각하자. 그래서 이번 사건들이 중요한 인(因)이 돼 신(新)노무현 정권. 신 정치세력의 형성이란 과(果)가 오기를 기대하자.

송진혁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