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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신화는 계속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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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밤중에 홀로 노고단을 오릅니다. 노고단은 아무래도 탯줄로 이어지는 신화의 초입이지요. 아직 어린 구상나무로 서서 이미 져버린 원추리 꽃을 생각하는데 한 여인이 희푸른 달빛을 타고 내려왔습니다. 마고 선녀인지 그대인지 사뿐히 내려앉아 다시 전설은 시작됩니다.

봄밤엔 홀로 처녀치마 꽃이 피고, 칠월칠석엔 까마귀 떼들이 어깨 걸고 오작교로 올랐겠지요. 천년 전에 그대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달빛을 타고 내려오시고, 아직 어린 구상나무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천둥번개의 말을 타고 달려오실 때, 비로소 노고단은 노고단이었고, 임걸령은 임걸령, 반야봉은 반야봉이었겠지요. 그러나 신화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신화는 비극적일수록 더 아름다운 법. 온다던 그대 끝내 오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미 천년 전에 그대의 어머니의 어머니는 망부석이 되고,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천년의 주목이 되었으니 기다림의 자세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요. 하지만 노고단 아래 아직 어린 구상나무 한 그루, 구름바다에 잠겨 눈썹이 희도록 탑돌이를 합니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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