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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경제 빛과 그림자] 上. 주말마다 쇼핑정체…세계 명품 불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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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러시아 경제가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몇년째 지속되고 있는 고(高)유가와 경제개혁 덕택이다. 이달 초 국제신용평가회사 무디스는 러시아의 국가신용등급을 두 단계나 올려 '투자적격(Baa3)'판정을 내렸다.

국민 사이에선 지금의 성장세가 계속될 경우 러시아가 머지않아 경제 선진국으로 도약할 것이란 낙관론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선 빈부격차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또 지난 주말 야당 성향의 러시아 최대 석유기업 유코스의 사장이 구속되는 등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국 불안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2회에 걸쳐 러시아 경제의 현재 상황 및 앞으로의 전망을 살펴본다.[편집자]

◇불붙은 경기=모스크바시 경계를 벗어나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2차선 도로 '루블료보-우스펜스코예 샤세'를 달리면 마치 유럽의 부유한 휴양도시에 온 것 같다. 오가는 차는 메르세데스 벤츠.BMW.아우디.페라리 등 고급차 일색이다.

도로 양편엔 그림 같은 별장이 쉴새없이 펼쳐진다.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과 유명 영화감독 니키타 미할코프 등 저명인사들의 별장이 이곳에 몰려 있으며, 2~3층 고급 별장이 계속 들어서고 있다. 뒤늦게 백만장자 대열에 낀 신흥 부자들이 앞다퉈 이곳에 몰려들고 있다.

모스크바 시내도 건축붐으로 뜨겁다. 수십층 규모의 현대식 아파트들이 세워지면서 모스크바의 스카이 라인이 바뀌고 있다. 대부분 평당 가격이 4천5백~1만2천달러(약 5백40만~1천4백40만원)에 이르는 고급 아파트들이다.

고급 자재를 이용, 실내를 유럽식으로 뜯어 고치는 아파트 수리 공사도 선풍적 인기다. 시 외곽에는 고급 건축자재를 취급하는 대형 매장이 수없이 생겨났다. 모스크바에서 5년째 한국산 건축자재를 수입.판매하고 있는 李모씨는 "지난해 중반 이후 거래량이 4~5배 가까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모스크바에 문을 연 고급 상품 전문매장도 호황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모스크바에만 6개의 지점이 낸 시계.귀금속 전문매장 '머큐리'의 홍보담당 야나 스체블레바는 "고객층이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며 "올해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최소 배 이상 늘었다"고 자랑한다.

이곳에선 개당 2천~1만7천달러인 롤렉스 등 고급시계와 1천달러 이상 보석 제품을 주로 취급한다. 고객 주문이 있으면 수십만달러짜리 보석도 판매한다. 머큐리 외에도 '자밀코' '칼리굴라' '콘술'등 호화 상품을 취급하는 매장이 수십개에 이른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들 매장에서 이루어지는 총거래 규모가 연 15억~2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스웨덴 가구 메이커 '이케아' 매장은 몰려드는 고객으로 연일 성시를 이룬다. 주말마다 모스크바 외곽순환도로 주변에 있는 이케아 매장에 고객의 자동차가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교통체증이 심해져 '이케아 정체'란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이케아 홍보담당 이리나 반넨코바는 "평일에 5천~2만명, 휴일에는 1만5천~3만명 정도의 고객이 매장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종합 쇼핑몰인 '람스토르' '메트로' 등의 대형 매장도 손님들로 붐비기는 마찬가지다.

고급 식당도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중국 식당을 비롯, 시내 주요 길목마다 새롭게 문을 연 일식집들은 한끼에 보통 30달러가 넘는데도 손님들로 항상 넘쳐난다. 특히 '야키토리야'등 유명 일식집은 줄을 서 기다려야 겨우 자리를 잡을 정도다.

◇경제지표는 계속 호조=러시아 국내 총생산(GDP)은 올해 8개월 동안 중국과 비슷한 수준인 7% 가량 성장했다. 러시아 정부는 올해 경제 성장률을 5.9%, 국제통화기금(IMF)은 이보다 높은 6.25%로 잡고 있다. 유가가 배럴당 22~23달러 정도로 떨어질 것을 고려한 수치다.

오일달러 유입으로 외환보유액도 급증해 10월 현재 6백30억달러에 달한다. 올초 4백70억달러에서 무려 1백50억달러가 늘어났다. 올해 물가상승률도 당초 목표치인 12% 이내에 머무를 전망이다. 전반적 경제 호조에 힘입어 주가 지수인 RTS도 올들어 75%나 올랐다.

98년 디폴트 선언 이후 러시아를 떠났던 외국투자자들도 다시 돌아오고 있다. 거대 석유 메이저인 영국 BP가 러시아 석유기업 TNK와 설립한 합작회사에 67억달러를 투자하기로 결정한 데 이어 세계 최대 석유기업 엑손모빌도 2백50억달러를 투자, 러시아 최대 석유사 '유코스-시브네프티'의 주식 40%를 인수하기 위한 협상을 벌이고 있다.

유통.생산업체들도 대(對)러 신규 투자를 검토 중이다. 독일계 거대 유통업체 '메트로'가 모스크바에서의 성공에 고무돼 지방 진출을 검토 중이며, 프랑스 식료품 업체 '다농'은 러시아 음료수업체 '윔블던'에 대규모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석유가 살린 경제=러시아 호황은 역시 높은 석유가격 덕분이다. 99년 이후 4년째 배럴당 20~30달러의 고유가가 계속되면서 쏟아져 들어온 오일달러는 빈사 상태의 러시아 경제를 회생시킨 원동력이 됐다. 이라크전 이후 떨어질 것으로 예상됐던 원유가는 아직 큰 변동을 보이지 않고 있다.

또 푸틴 대통령의 강력한 통치력에 따른 정치.사회 안정과 그가 추진 중인 공기업 민영화 등 각종 개혁정책도 경제성장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다.

모스크바=유철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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