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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와 평화(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노벨상이라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상이다. 그러나 이 노벨상도 때에 따라서는 주고도 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1952년 노벨평화상의 수상자로 지명된 슈바이처는 수상식에 참석해 달라는 주최측의 통고를 받고 이렇게 말했다. 『환자들 뒤치다꺼리 하기도 바쁜데 훈장나부라기하나 받으려고 시간을 낼 수 있겠는가.』
독설가로 유명한 버나드 쇼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어느 핸가 그가 노벨문학상 후보가 되었을 때 기자들이 소감을 물었다. 그러자 쇼는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1925년에 나는 아무 것도 쓴 것이 없어요. 아마 그래서 상을 타게 되는 모양이지요.』
언젠가 뉴욕타임스는 가상인물을 내세워 노벨상을 비판한 사설을 실은 일이 있었다. 그 요지를 보면 대충 이렇다.
『나는 나의 연구에 대해 노벨상이 주어진 것을 고맙게 생각하나 이를 거부해야만 한다. 이 상이 가져다 주는 상금이 심히 오염되어 있는 것은 차치하고 나의 발견은 15명의 동료들이 이룩한 연구결과를 약간 발전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에 대해 개별상을 주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한 것이다. 하지만 노벨위원회가 변덕스럽게 편협한 판단으로 수상자들을 선정한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른 어느 부문보다 평화상에 대한 비판은 더욱 신랄하다.
『…특히 노벨평화상에 관해서는 노벨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념함으로써 가해지는 모욕은 하나의 패러독스다.
노벨위원회는 역사적 판단을 얻기 위해 수년간이나마 기다리지도 않고 전쟁의 와중에 개입되어 있는 정치인들과 한창 선전공세중인 외교관들에게 평화상을 수여하고 있는 것이다.』
알프레드 노벨이 이 상을 제정할 때 평화상만은 스웨덴이 아닌 노르웨이 의회에서 선정토록한 것을 봐도 「평화」라는 이름은 극히 예민한 부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역대 평화상 수상자가 결정될 때마다 적지않은 말썽의 소지를 남겨온 것도 사실이다.
신문을 보면 「서울평화상」의 후보추천인 선정이 지지부진한 모양이다. 물론 서울평화상은 명칭만 그렇지 스포츠를 통해 세계평화와 인류화합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상이름을 바꾸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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