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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CoverStory] 단풍강산 호젓하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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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월정사를 지나 상원사 가는 길

능선을 굽어보는 오대산 중턱에 낡은 너와집 암자(작은 사진)한 채가 서 있다. 가지런히 쌓인 장작 더미에서 스님 성품이 읽힌다. 고요한 암자 앞뜰. 잘 익은 호박 몇 개가 가을 햇볕 속에 좌선 중인데 다람쥐들만 분주하다.

<오대산 서대암> 글=성시윤 기자 <copipi@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월정사를 지나쳐 상원사 주차장에 닿은 것만으로 단풍맞이는 이미 충분히 즐긴 셈이었다. 아름드리 전나무 숲길을 지나친 이후 줄곧 오대산 계곡의 단풍에 감탄을 여러 차례 토해냈으니.

그래도 상원사 인근에 정말로 멋진 암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은 터였다. 일명 서대암(西臺庵).

신라시대 자장율사는 당(唐) 유학 뒤 이 산에다 오대산(五臺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산자락에서 제법 평평하면서도 주변이 내려다 보이는 몇 곳을 골라 암자를 앉혔다. 동대.서대.남대.북대.중대 이렇게 다섯 곳의 암자가 그들이다.

현재 서대를 제외한 나머지 암자들은 이정표가 잘 나 있다. 반면 서대암 길목은 찾기가 쉽지 않다. 상원사 본찰 앞을 지나쳐 비로봉을 향하는 오르막길. 그 길 왼쪽 옆으로 희미한 흔적의 샛길이 남아 있다. 길은 한 사람만 지날 수 있을 만큼 비좁다. 서대암에 기거하는 스님, 그리고 암자를 찾는 몇몇 신도의 발길만으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조릿대 군락을 잠시 지나치자 숲은 층층나무.단풍나무.복자기 등의 활엽수 단풍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길 위로는 낙엽도 제법 쌓였다.

'사박 사박'하는 사람 발자국 소리 중간에 '사사삭 사사삭'하는 소리가 끼어들다가 두 소리가 함께 멎는다. 사람과 다람쥐가 서로의 소리에 놀란 것인가. 어느덧 '짹 짹 짹 짹'하며 들려오는 박새 소리. 새는 나무껍질 속에다 겨울 날 먹이를 감추느라 한창 바쁠 것이다.

다소 가파른 경사를 지나치니 까치박달나무의 낙엽이 눈에 띈다. 대롱처럼 돌돌 말리는 까치박달나무의 낙엽은 날이 더 추워지면 벌레들이 한기를 피해 동면하는 안식처가 된다. 까치박달나무가 있다면 숲 치고는 고령에 속한다는 극상림이다. 오솔길 옆으로 고사목이 몇 그루 쓰러져 있고, 벌레가 송송 구멍을 뚫은 거죽 위에는 푸른 이끼가 그득히 끼었다.

가을 햇살이 비스듬히 비치는 단풍 숲. 바람이 불자 단풍끼리 서로 스치는 소리, 낙엽이 다른 나무의 단풍 위에 내려 앉는 소리, 낙엽이 낙엽 위를 뒹구는 소리가 겹쳐진다.

샛길로 접어든 뒤 40분. 오르막이 경사가 완만한 평지로 뒤바뀐다. 서대(西臺)에 당도한 듯.

오솔길 옆으로 우통수(于筒水)의 위치를 알리는 표석이 나타난다. 속리산 삼파수, 충주 달천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명수로 전해졌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80년대 강원도 태백시 검룡소가 나타나기 전까지 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던 곳이다. 어떻게 새 발원지를 찾아냈을까.

우통수에서 시작된 오대천과 검룡소에서 발원한 창죽천이 정선에서 만나는데 합수 지점에서 발원지까지의 길이를 인공위성 사진에서 재 보니 검룡소 쪽이 30여㎞ 더 길더라는 것이다.

우통수 위를 덮은 나무 뚜껑을 열어 물맛을 보고 있자니, 굴참나무로 지붕과 벽을 쌓은 너와집 한 채가 눈에 든다. 새로 치장한 듯한 앞면을 빼놓고는 수십 년은 족히 됐음 직하다. 앞면의 서대 염불암(西臺念佛庵)이라는 현판만 없다면 영락없이 화전민의 집으로 여길 법하다.

옛 문헌에는 이곳에 '수정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하고, 국립공원관리공단 측에서 펴낸 산행 지도에도 현재까지 수정암으로 표시돼 있으니 암자의 이름이 바뀐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닌 듯하다.

스님 한 분이 수행 중이라는 암자는 안팎이 정갈하기 그지없다. 암자 정면의 아기자기한 채소밭은 스님의 손이 많이 닿은 듯 잡초를 보기 어렵고 이랑도 정연하다. 밭에는 방울토마토와 고추.가지.상추.배추.무 등이 싱그럽게 자라고 있다. 호박은 스님이 수시로 뒤집어준 듯 뒹굴다 멈춘 모습으로 능선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암자 정면에 기대어 서 있는 나무 의자 하나. 이곳 스님이 나무를 깎고 다듬어 만든 듯하다. 이 의자에 앉으면 누구나 면벽(面壁), 아니 면산(面山) 참선에 들게 될 듯 싶다.

"부시럭 부시럭."

다람쥐 기척이라 하기엔 제법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기에 채소밭 아래 산비알을 내려다 보니 족제비 한 마리가 나무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나뭇가지 위에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듯한 다람쥐 한 마리가 오르지도 내려가지도 못한 채 꼼짝 않고 있다. 자연은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것인데 스님이 이 광경을 본다면 어찌 할까.

푹 익어 곧 땅에 떨어질 것 같은 토마토가 눈에 들어온다. 하나를 슬쩍 따 입에 넣는다. 그리고 또 능선 저편 단풍에 정신을 놓는다. 한참 뒤 다시 돌아보니 다람쥐도 족제비도 흔적을 감춰 버렸다.

스님은 언제 돌아오실까. 여염(麗艶)한 단풍잎은 계속 떨어질 텐데.

◆ 찾아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진부 나들목을 나와 6번 국도를 타고 오대산 방향으로 진행. 오대산호텔 지나 병안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오대산 국립공원 월정 매표소.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는 자동차로 통행 가능. 상원사 주차장에 주차한 뒤 상원사 본찰 앞을 지나 500m 가서 시멘트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 오솔길로 가면 우통수 방향임. 상원사 033-332-6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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