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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윤보선 전대통령 영전에… 이재형 전국회의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야당사에 남긴 뚜렷한 족적
해위선생.
급성 신부전증으로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졸였습니다만 오늘 막상 부음을 접하고 보니 황망한 마음 가눌길 없습니다.
평소의 굽힐 줄 모르는 성품과 타고난 건강으로 또다시 병마를 이기고 일어 나시리라 믿고 병문안조차 제대로 못했는데 이렇게 유명을 달리하시니 송구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향년 93세면 천수를 누렸다 하겠지만 한국야당사에 남긴 뚜렷한 족적을 생각하면 아직도 좀더 등불이 되어주셨으면 하는 아쉬움 가눌길 없습니다.
해위선생.
저는 선생과 같은 야당생활을 하면서도 선생의 안국동 사랑방을 무시로 출입할 정도로 자별한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5ㆍ16당시 선생께서 군사정권과 더불어 10개월 남짓 대통령자리를 지키신데 대해 미심쩍은 소회를 가진적이 있습니다.
5ㆍ16 발발당시 저는 영국정부 초청으로 런던에 가는 길에 독일에서 소식을 듣고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영국의 한 신문이 「민주당 신파인 장면 내각의 붕괴를 구파인 윤보선대통령은 무릎밑에 손을 넣은 채 바라만 보고 있다」고 한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제법 흐른뒤 저는 선생께 『왜 5ㆍ16때 당장 대통령직을 물러나지 않고 정치정화법에 서명까지 하고 나오셨느냐』고 여쭈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께서는 『당시 법률로는 국무회의에서 가결된 법안을 대통령은 서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며 『대통령직을 그만둘 때 까지는 법이 정한 대통령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답변하셨읍니다.
흔쾌한 납득을 못한채 저는 선생의 그런 행동이 영국식교육의 준법정신이 몸에 밴 탓이겠거니 짐작만 하고 지냈습니다. 제가 그런 설명을 좀더 이해하게 된 것은 또 한참 세월이 지나고 나서였습니다.
제가 71년 정계를 은퇴하고 서울을 떠나 안양 본가에서 지낼 때였습니다. 75년인가요. 명동성당 시국 선언문 발표사건이 있었지요. 선생은 함석헌씨등 십수명의 피고인들과 함께 법정에 서는 몸이 되셨습니다. 선생이 삼복더위에 그 특유의 단추 셋달린 양복을 입고 젊은 판ㆍ검사앞에서 부동자세로 서서 깍듯이 존대말로 응하셨다는 말을 전해듣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77세 노인에 전직대통령으로서 구태여 법정에 나가시지 않아도 누가 끌어갈 사람도 없었고 더욱이 선생은 박정희대통령과는 적대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정권은 반대하지만 법은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시면서 법정에 출두하셨습니다.
저는 그 다음해부터 새해에 꼭 선생댁으로 세배를 다녔습니다. 물론 저도 선생을 가까이서 대한 기간이 있었습니다. 한일회담이 막바지에 이른 65년 우리는 함께 한일기본조약 비준을 반대하다가 끝내 민중당을 탈당,의원직을 버리고 말았지요. 그후 우리는 선생이 선봉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장외투쟁을 하면서 신한당을 창당하였습니다.
그때 자금이 변변치 못했던 우리는 선생과 제가 하루씩 번갈아 비용을 댔습니다. 초가을 서산의 한 공원에서 연설을 끝낸 뒤 햇송이 버섯구이를 반찬으로 점심을 먹으면서 우린 얼마나 기꺼워했습니까.
이제 선생은 가셨지만 선생께서 남기신 『낮에는 야당,밤에는 여당』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선명야당』등의 말씀은 이 나라 정치사의 한 단면을 증언하면서 남을 것입니다.
선생께서 그렇게도 반대했던 한일회담을 회고하면서 아직도 재일교포의 법적지위문제와 원폭피해자 보상문제등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새삼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승에서 못다한 꿈 모두 잊고 가시는 길 편안히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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