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유럽공산정권 몰락·소의 변신 자본주의 승리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미국의 뉴 레프트사상을 대표하는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하워드 진 교수(67·보스턴대)는 최근 일본신문에 보낸 기고문에서 유럽공산정권의 몰락과 소련의 변신이 바로 자본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진 교수는 미국의「방임주의」의 허실을 날카롭게 비판, 참된 민주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지침을 이 기고문에서 제시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문 내용요지.【편집자주】
현재 미국의 정치가·언론인·대학교수들은 소련과 동유럽의 격변을 바라보면서 이구동성으로『냉전은 끝났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에 승리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들의 반응은 극히 오만할 뿐 아니라 문제의 핵심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그릇된 견해는 사회주의 철학에 대한 오해와 자본주의의 역사를 직시하지 않으려는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그동안 소련·동유럽에 구축했던 스탈린식 당 관료정치가 바로 사회주의의 참모습이라는 전제하에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참다운 이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치아래 20세기에 건설된 경찰국가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만일 사회주의의 이상이 독재체제확립의 언론자유 억압,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도입으로 이해됐다면 사회주의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최근 간행되는 미국출판물 중에는「자유방임주의」의 승리를 찬미하는「말의 홍수」가 터져 나오고 있다.
또 시장경제를 통해 동유럽국가들의 경제문제가 일거에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미국의 자유방임주의에는 결코 유쾌하다고 할 수 없는 역사가 있다. 그것은 2백년간에 걸친 흑인노예제도와 공장의 가혹한 노동조건에서 노동자들을「착취한 역사」를 담고 있다.
이 역사는 10세도 채 안된 아동을 탄광과 섬유공장으로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철도건설을 위해 수많은 흑인·중국인·쿨리들이 질병과 과로로 죽어가야 했던 참혹한 역사.
방임주의는 또 도시노동자의 생활조건에 대한 정부의 철저한 무책임을 의미했다.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생명을 갉아먹는 석탄가루와 석면가루 등을 호흡하고 가정에서는 오염된 식수를 마셔야했다.
자본주의의 경제행위에 대한 정부의 불간섭 정책이 부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미국이 초기에 이룩한 거대한 부는 정부가 소수의 특권층에 토지를 불하한 결과 이룩된 것이다.
미국 건국의 공로자였던 알렉산더 해밀턴 초대 재무장관은 정부와 부자들과의 협력관계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자로 태어나는 것이 중요하다.…(중략) 제1급의 사람들은 정부 내에서 특별하고도 영속적인 역할이 부여돼야 한다.』
이와 같은「철학」은 그 후 2백년동안 미 경제정책의 근간을 이뤄왔다.
미국의 제도는 항상 빈자에 대해서는 방임주의로, 부자에 대해서는 원조정책을 보장(?)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미 정부의「주택시장불개입」원칙이 수백만 미국인들의 내 집 마련을 불가능하게 만든 주요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의료의 자유시장」으로 3천만명의 미국인들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미국중산층과 일부 노동자계급의 높은 생활수준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니 그것이 방임주의정책과 자유시장의 결과는 결코 아니다. 이는 긴 역사를 지닌 노동쟁의와 노동조합운동의 소중한 유산이다.
최근 동유럽에서 일고 있는 민주화요구가 단순히 이 같은 방임주의체제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왜곡된 사회주의 이상에 대한 반란이며 관료주의와 독재체제, 열악한 생활수준에 대한 지양이다.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번영을 향유하려면 그릇된 방임주의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해야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