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나라불안의 진원일 수 있는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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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금 국회는 40여년 헌정사에서 최악의 기록을 또 하나 추가하고 있다. 30일간의 회기에서 과거 독재시절의 모든 구태가 집중적으로,남김없이 재연되고 다수 여당에 의해 마지막 협상의 시도마저 한번 없은 채 중요 법안의 무더기 날치기 일방처리를 기록하고 말았다. 이번 국회의 전말을 보면 과거 흔히 보아온 단순한 여야정쟁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정계의 구조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도대체 30일간의 회기가 다 가도록 이번 국회가 한 것이 무엇인가.
거여의 날치기와 일방 강행통과,소야의 육탄저지 속에서 시정잡배들처럼 욕설과 삿대질을 일삼고 폭력을 휘두른 것외에 이번 제150회 임시국회가 한 일이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국회꼴을 보면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비통함과 분노와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지금 때가 어떤 때이고 국내외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데 국회꼴이 이 지경인가를 생각하면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세계는 모두 민주주의와 자국민의 자유ㆍ복지의 증진이란 도도한 조류속에서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고,우리와 같은 분단국이었던 독일은 완전한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다. 우리 역시 모처럼 남북한의 총리회담을 달포후면 보게 될 전망이고,이런 국제정세속에서 잘만하면 통일도 멀지 않았다는 부푼 기대감을 안고 있다.
어느 때보다 우리 내부를 정돈하고 국민적 에너지를 조직,동원하여 역사적 호기에 대비해야 할 이런 시기에 바로 그런 일을 주도적으로 맡아야 할 여야정치권이 오늘날 국회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지도적 기능,문제해결의 기능은 고사하고 국회가 열리기만 하면 정국불안ㆍ사회혼란의 원인이나 제공하고 온통 사회를 뒤숭숭하게만 만들 뿐이다.
이번에도 보면 남북 총리회담이 있거나 말거나,대학생 수천명이 유급되는 사상 최초의 일이 벌어지거나 말거나 여야가 한 일이라고는 벌써 오래전에 역사의 쓰레기통에 처박아야 했을 구태의 정쟁,그것뿐이었다. 그런 결과 나온 것이 무엇인가. 전 방송사 노조의 연대 제작거부나 주가의 대폭락을 가져오려고 그렇게 치고받고 날치기 강행과 단상점거를 했다는 말인가.
국민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여야가 왜 그렇게 싸우는지 까닭조차 알기 어려울 지경이다. 방송관계법이 하루 이틀을 다툴 만큼 급한 법인가,국군조직법은 좀더 국민을 납득시킨 후 하면 안되는 것인가,추경예산안은 야당이 꼭 결사적으로 저지해야 하는 것인가, 또 야당이 이런 법을 결사적으로 꼭 막으려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국민들은 통 감을 잡기 어렵다.
문제가 있다면 국민 앞에 문제를 제시하고 개선방안을 놓고 다투는 것이 의회정치의 상식인데도 문제가 뭔지를 분명히 하는 과정도 없이 강행통과와 결사저지로만 맞붙었으니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보기에 여야대립은 이른바 쟁점법안에 대한 이견을 표면상의 명분으로 하고 있을 뿐 실은 다음선거를 앞둔 당리당략과 정치적 야심의 충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도 상대방에 유리한 일이면 반대하고,나라와 국민을 위해 나쁜 일이라도 자기에게 유리한 일이라면 밀어붙이는,이런 도덕성도 윤리도 없는 정치가 지금 횡행하고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 그러다보니 국회가 국회구실을 못하게 되고 여야간의 편싸움 장소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여야 정치인들이 온갖 그럴듯한 말로 꾸며대도 국민들은 이런 저질의 정치속 사정은 이미 체험으로,감으로 알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국회의원들 꼴도 보기 싫다』 『모조리 쓸어버려야 한다』는 국회무용론,정치권 경멸론이 팽배하며 여기에는 여야구분도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를 생각하면 두렵기 짝이 없다. 대체세력이 없는 가운데 사실상의 정치 공동화ㆍ지도층 붕괴가 가져올 것은 혼란과 불안의 심화요,만성적인 위기상황일 뿐이다.
우리는 현재의 정치권에 대해 더 이상 어떤 충고를 할만큼 기대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권은 지금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의 실체와 그것이 가져올 파국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되고 현 상황에서 최악의 코스를 피하기 위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오늘의 이런 정치판을 만들어낸 여야수뇌부의 책임문제가 이제는 거론돼야 할 것이며,최소한의 상식적인 정치의 복원을 위한 과감한 결단이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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