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교류|「선언」 보다 작은 실천 아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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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얼마전 동서독의 경제 통합을 앞두고 통일 화폐인 서독 마르크화의 교환을 위해 무장 호송차 50여대가 장벽을 넘어 동베를린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도됐다.
북에 가족을 두고 온 실향민으로서 우리는 언제쯤 저런 일이 생길까하는 부러움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2백50억 마르크 상당의 지폐와 동전을 운반하고 있는 서독의 운전자는 그 돈의 무게를 분단의 무게로 느끼면서 동쪽의 돈이 바로 그들을 갈라놓았던 이념적·군사적 대결의 상징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통일 화폐를 손에 쥔 동쪽의 사람들은 작년 11월 베를린 장벽 철거 때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통일」을 비로소 실감했을 것이다.
통일을 부르짖으면서도 뒤로는 딴청을 피웠던 「선언의 시대」가 가고 통일이 현실로 다가오자 그 현실이 꿈같기도 했을 것이다.
손에 쥔 서쪽의 돈이 행복한 삶을 보강해 줄 수 있을까하는 불안감도 없지는 않지만 쪼개져 둘이었던 그들이 하나가 되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남모르는 자신감과 희망에 부풀었을 것이다.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제 전세계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 5월20일 대만의 이등휘 총통은 8대 총통에 취임하면서 『하나의 중국이라는 전제하에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의 채널을 열자」며 반 중국 정책의 대전환을 선언했다.
이미 그들은 87년에 민간인의 본토 친척 방문 허용, 88년 본토 영화 상영 허용 및 서신 발송 허용, 89년에는 기자의 대륙 방문 취재 허용과 언론사의 지사 설치를 허용한 상태였다.
이러한 중국 민족의 「통일 달리기」는 독일보다 뒤쳐져 있지만 현재의 정황으로 보아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분단 극복을 위한 서로간의 합의를 볼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는 이들보다 훨씬 앞서 통일 논의가 있어 왔음에도 북의 화폐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며, 북쪽의 사람도 남쪽의 사람 사는 모습이 어떤지 모를 것이다.
우리는 아직 「통일 달리기」의 출발선에도 서지 못했다. 우리 민족의 통일 열망이 독일이나 중국 민족보다 모자라서인가, 이념의 장벽을 극복하기에 40년이라는 세월이 아직도 짧기 때문인가.
동서독의 실질적인 통일을 허탈하게 바라보면서 수많은「선언」보다 이산가족 교환 방문 서신 왕래, 취재 허용 등 작은 실천하나가 아쉬운 오늘이다. 권영재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수정 아파트 4동 3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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