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저(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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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청백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했던 조선조 초기의 관리들에게 청백한 기풍을 불어넣는데 기여한 비우사상이란 게 있었다. 비우란 무슨 거창한 이론이 아니고 글자 그대로 「비를 피한다」는 뜻으로 태종때 정승을 지낸 유관의 청빈한 생활철학에서 나온 말이다.
그 유관에게 이런 일화가 있다. 그는 흥인문밖에 살았는데 집이라는 게 울타리도 없는 두어칸 오두막이었다. 그래서 태종은 공감을 시켜 밤중에 몰래 그의 오두막에 갈대로 엮은 갈자리로 울타리를 쳐주었다.
장마철이 되어 유관의 초가삼간에 비가 샜다. 다행히 찢어진 우산이 하나 있어 그걸 받치고 글을 읽으면서 그는 아내에게 『우산이 없는 사람은 이 빗속에서 어떻게 지내는고』하고 걱정했다고 한다.
후에 유관의 외현손인 지봉 이수광이 그가 살던 집터에 새 집을 짓고 비우당이란 당호를 새겨 그의 청백을 기렸다. 비우사상은 바로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최근 백담사에 은거하고 있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서울 연희동 사저를 둘러싸고 국회에서 논란을 빚고 있다. 정부쪽의 입장은 전직대통령에 대한 예우와 사유재산임을 고려,본인에게 되돌려 줄 뜻을 비춘데 비해 야당쪽에서는 국가에 헌납한 재산이므로 당연히 국가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따지고 보면 전직대통령이 자기집 한칸 없이 백담사에 그냥 눌러앉아 있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는 않다. 더구나 백담사는 설악산등반로의 길목이며 사찰 자체도 평소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인데 전직대통령의 경호 때문에 여러사람들에게 불편을 주고 있다.
그렇다고 연희동 사저로 되돌아간다는 것도 어딘가 석연치 못한 구석이 있다. 우선 본인의 입으로 『국민의 뜻에 따라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밝힌 것도 그렇지만 대통령 재직시 사저를 대폭 증축했고 주변의 땅마저 공원화한 것이 그렇다. 또 학생들의 반대 시위를 예상하고 전경들이 상주할 것이 틀림없다. 역시 모양새가 좋지 않고 주위에 불편을 주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두가지를 다 충족시키는 방법이 있다. 사저는 본인의 약속대로 국가에 귀속시키는 대신 전직대통령을 예우하는 조촐한 집한칸을 교외에 마련해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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