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의 정확한 분석없이 좋은 내용을 담을 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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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학년도 입시에서 많은 대학이 논술고사를 치를 예정이다. 대입은 이제 '논술의 시대'가 돼가고 있다. 학생들에게 글쓰기는 이젠 피할 수 없는 현실이고, 두려움의 대상이 됐다. 이에 따라 중앙일보 프리미엄은 공성수의 논술 총론을 마치고 실전편을 여러 회에 걸쳐 소개한다.

좋은 논술문을 '잘 만들어진 그릇에 담긴 맛있는 음식'에 비유해보면 어떨까.

아무리 비싼 그릇에 담겨있다고 해도 음식의 맛이 별로라면 사람들이 그 음식을 좋아할 리 없다. 반대로 아무리 훌륭한 음식이라 해도 적당한 그릇에 담겨 나오지 않는다면 음식 맛을 제대로 음미하기 어려워진다.

찌개를 접시에 담아낼 수 없듯, 내용물과 그것을 담는 도구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좋은 논술을 위해선 내용과 형식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해왔던 작업은 예쁘게 잘 빚어진 그릇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내용으로 어떤 문제가 나와도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논술의 기본을 탄탄하게 쌓는 일을 우리는 해왔다. 글쓰기의 기본을 갖추지 못한 글이 좋은 점수를 받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리에서 중요한 것이 결국엔 맛인 것처럼, 좋은 논술문은 그 내용이 남달라야 한다. 남과는 다른 자기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논술, 자신의 생각을 탄탄한 논리를 통해 보여주는 논술, 사건의 핵심과 본질을 꿰뚫는 논술은 모두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얼마나 다양하게 바라보는가라는 내용적인 문제와 연결된다.

그럼 어떻게 하면 자신의 글에 좋은 내용을 담을 수 있을까. 평소 어떻게 연습해야 생각 키우는 능력을 기를 수 있을까.

우선 오늘은 좋은 내용을 생각하고 쓰는 맨 첫 번째 단계가 주어진 논제와 제시문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라는 사실에서 시작해보자. 주어진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면 제대로 된 내용을 쓸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당연히 독해능력을 키우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귀에 딱지가 앉았을 만큼 들어본 진부한 이야기이니 생략하기로 하고, 대신 여기서 우리는 주어진 제시문들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제시문들은 의미 없이 나열되지 않는다. 기출문제들을 살펴보면 주어진 제시문들에 일정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각각의 제시문들은 하나의 주제와 연관된 서로 상반된 가치들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문제에서 제시문 ㉮ ㉯ ㉰가 주어졌다면 ㉮와 ㉯는 의미상 서로 대립된 관점을 취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는 이 논제를 해결하는 키워드를 제공할 수 있는 제시문이다. 다시 말해 ㉮와 ㉯가 서로 대립하는 내용이라면, 이와는 달리 ㉰는 ㉮또는 ㉯의 반복이거나 혹은 앞의 두 내용을 변증법적으로 절충한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 대부분 대학의 논술문제는 이처럼 서로 상반된 가치들 속에서 학생들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판단하는가를 측정하기 위해 고안된다.

그렇다면 이런 제시문 사이의 관계를 역이용해 논술 학습의 방향을 잡아보는 것은 어떨까. 즉, 평소 미리 하나의 주제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을 함께 묶어 생각해보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다. 또한 서로 다른 주장이 상충하고 있는 시사적이고 철학적인 논제들을 찾아서 공부해보는 것도 현명한 방법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저작권 논쟁은 카피라이트와 카피레프트라는 서로 다른 생각 사이의 충돌이며 성장과 분배의 논리는 현실을 바라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다.

문화 주권과 세계화는 나름의 논리와 정당성을 가지는 서로 다른 입장이고, FTA를 둘러싼 논쟁은 가장 시급한 당면과제다. 물론 이 문제들이 간단하게 답을 내릴 수 있는 만만한 주제는 아니다. 하지만 논술 채점자들 역시 학생들에게 이런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충격적이고 황당한 대안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차분하게 전개하는 논리의 신선함이다.

수능을 불과 한 달여 남겨둔 요즘 자칫 논술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지기 쉽다. 그러나 입시는 긴 레이스다. 바쁘지만 조금씩 짬을 내 출제 가능한 논제들에 관해 고민해보는 것, 그것은 정시 논술을 위해 큰 힘이 된다. 정시까지 그 같은 논제들을 제공할 예정이다. 함께 고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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