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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대란의 현장 르포] "이젠 시댁에 들어가 살아야죠"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

‘전세대란’이란 말이 어울릴 듯하다. 올 가을 전세 구하려는 사람들로 아우성이다. 정부는 온갖 부동산 대책으로 집값이 잡히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은 집없는 서민들의 고통만 가중되고 있다. 물론 계절적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전세난은 공급 부족과 월세 전이에 따른 구조적인 문제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전세대란’의 현장을 취재했다.


뉴타운으로 지정된 서울 노원구 상계동. 이 일대 아파트 주변 상가에는 공인중개소들이 쭉 들어서 있다. 지난 9월 28일 상계동 K공인중개소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K공인중개소입니다.”
“혹시 25평형 아파트로 들어온 전세 물량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약간 큰 평수 아파트로 들어갈 수 있는 전세는 있나요?”
“현재 25평형, 30평형뿐만 아니라 모든 평수에 거래될 만한 전세가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군요.”
“물건이 나오면 바로 전화 드릴게요.”

통화를 마친 K공인중개소 사장은 “하루에도 전세를 찾는 문의가 10건 이상씩 온다”며 “요즘은 들어오는 전세 물량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전세 수요자 대부분이 집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올해 초만 하더라도 일주일에 5건 정도씩 거래가 이뤄지던 모습에 비하면 상반되는 모습이다. K공인중개소 측은 “올 3월까지만 해도 전세 물량이 한 달에 15건 이상씩 들어왔기 때문에 집을 원하는 사람은 대부분 쉽게 집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주일에 1건도 거래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 8월에 결혼한 이정하(29·여) 씨는 “결혼 전부터 비교적 집값 부담이 적은 상계동·방학동 일대에 전세를 알아봤다. 20여 곳의 공인중개소를 다녔지만 인근 지역에 잔여 물량이 거의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요구하는 가격이 너무 높아 계약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시댁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우리에게 ‘전세대란’은 익숙한 말이 아니었다. 그럼 몇 개월 만에 이런 사태가 왜 터진 것일까? 민간 부동산 전문가들은 지난해 8·31 부동산 대책이 시행된 이후부터 전세난이 심각해졌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다주택자 세금 강화 등으로 향후 집값이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매입 수요가 전세 수요로 급격히 돌아서고 있다. 특히 서울 및 수도권 지역의 전셋값 강세는 2007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10·29 대책 이후 여러 가지 규제와 집주인들의 보유세 부담으로 전세를 월세로 전환했기 때문에 전세 공급 물량이 대폭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쌍춘년이라는 관습적인 요인 때문에 신혼세대가 늘어 수요가 늘어났다.

상계동에서 I부동산을 운영하고 있는 공인중개사 박승렬(44)씨는 “상계동만 하더라도 1가구 2주택자들이 내년부터 시행될 양도세 부담을 피하기 위해 전세 물량 대부분을 매매로 돌리고 있기 때문에 전세 물량이 줄어드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공급이 줄어든 상황에서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에 전셋값이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집값 안정을 통해 서민들의 주거복지를 향상시키겠다는 부동산 정책은 오히려 서민들의 주거복지를 악화시키고 있는 듯하다.

상계동은 2년 동안 전셋값이 평균 500만원 가량 오르는 안정적인 동네였다. 하지만 올 9월에 거래되는 전세 매매가가 지난해와 비교해 1년 만에 1000만원이나 상승했다<표 참조>.

현재 상계동에서 30평형을 전세로 살고 있는 박지연(37·여)씨도 다른 전셋집을 알아보고 있다. 얼마 전 집주인으로부터 전셋값을 1000만원 올려달라는 요구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000만원을 더 낼 수 있는 형편이 안 돼 비슷한 아파트로 이사를 계획하고 있지만 마땅치 않은 실정이다.

박씨는 “주변 여러 곳을 알아봤지만 다들 기본적으로 800만원에서 1100만원까지 올랐다. 1000만원이라는 액수가 부담되지만 상황이 그렇다니 집주인의 요구를 들어주고 집을 얻을 수밖에 상황”이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박씨는 할 수 없이 은행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장은 살아갈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계속 전셋값이 오른다면 집없는 서민들은 어디에서 살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반면 집주인들은 올릴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그들은 대부분 1가구 2주택자들이기 때문에 양도세가 부담된다는 것이다. 상계동에 25평형 아파트를 전세로 내놓고 있는 황모(64)씨는 “정부의 부동산 대책으로 양도세가 50% 오르기 때문에 상당히 부담된다. 물론 일정액의 양도세를 내기는 해야겠지만, 집을 2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세금을 그렇게 많이 낸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불만을 보였다.

정부는 서민들의 고충을 해결하고자 지난달 13일 ‘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 영세민 전세자금 지원액을 1조6000억원에서 2조원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서민들은 이 정책의 효과에 의문을 품고 있다. 정부는 최근 전세난이 가을철 이사와 결혼 때문에 몰리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전세 자금을 지원한다고 해도 어려운 살림살이에 그 돈을 빌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어차피 빚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김용덕 건설교통부 차관은 “7, 8월 서울 아파트 전세금 상승률이 같은 기간 과거 20년 평균 상승률을 밑돌고 있다”면서 “주택시장이 안정기에 접어든 만큼 전세 불안은 10월 이후에 곧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현재 서민들이 겪고 있는 전세난이 일시적인 현상이며 정부의 정책으로 조만간 해소될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민간 전문가들은 최근의 전세금 상승은 구조적 요인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부동산컨설팅 업체 관계자는 “서울과 인천, 경기지역은 주택보급률이 90%대이다. 하지만 인구의 지속적인 유입으로 전세 수요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정부는 계속 유입되는 인구에 대한 주택공급률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동산 실무 연구기관인 LBA 경제연구소 김점수 소장은 “현재 2만 달러 이상의 국민소득을 보이는 나라들은 ‘전세’라는 매매 형태가 없다. 오히려 ‘월세’를 통한 주거 매매가 활발하다. 우리나라도 점차 이러한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에 보이는 모습들은 ‘전세대란’이 아니라 ‘선진국형 주거매매’ 형태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김 소장은 “정부에서는 강한 규제를 통해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킬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상황을 제대로 진단하고 이에 맞는 정확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남영 기자 hynews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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