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열며

농구를 사랑한 고 정몽헌 회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1999년 1월 28일.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기자는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과 약속이 있었다. 이날 저녁 대전에서 열리는 현대와 대우의 프로농구 경기를 함께 관전하기로 한 것이다. 마치 골프 부킹을 하듯이, 여러 날 전에 해둔 약속이었다. 농구단 단장을 맡고 있던 강명구 전 현대택배 회장이 약속이 어긋날까봐 여러 번 확인을 했다.

오후 세 시쯤 종로구 계동의 현대사옥 12층에 있는 강 단장의 사무실에 가서 정 회장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런데 정 회장은 연락 대신 직접 강 단장 사무실을 찾아와 방문을 열더니 급하게 말했다. "아유, 이거 어떡하나? 갑자기 일이 생겨서… 허형, 대전에는 나중에 갈게요…." 강 단장과 함께 사무실을 떠나려는데 전화가 왔다. 강 단장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정 회장) 차를 타고 가라시는군."

이 약속을 하기 전에 정 회장은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우리 팀이 왜 자꾸 대우에 지는 거냐"고. 당시 현대는 최강의 전력을 보유했고, 리그 선두를 달렸다. 그런데 대우에는 번번이 졌고 경기 내용도 좋지 못했다. "현대 선수들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걸 보니 징크스 같은 게 있는 모양"이라고 대답하자 "그럼 이번에도 지는 건가요?"하고 물었다. '야, 이거 이번에도 지면 큰일 나겠구나' 싶었다.

정 회장은 정말로 농구를 좋아했다. 그의 농구 사랑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만큼이나 대단했다. 정 명예회장은 이충희나 전주원 같은 일류 선수들의 스카우트를 직접 지시할 만큼 적극적이었고, 현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을 친자식처럼 아꼈다. 선수들을 자주 자택에 초대해 함께 식사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훈련장을 방문했다.

97년 프로가 출범하기 전 큰 인기를 모은 '농구대잔치' 시절, 대회를 주관하는 대한농구협회는 해마다 정월 초하루 같은 명절에 현대와 삼성의 라이벌전을 마련했다. 대한민국 굴지의 그룹이 코트에서 격돌하는 라이벌전이어서 경기장은 만원을 이뤘고, 두 그룹 관계자들이 대거 경기장을 찾아 관전했다. 정몽헌 회장이 그런 굵직한 경기를 놓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언젠가 스포츠 잡지에 "농구를 만든 것은 하늘을 날고 싶었던 인간의 꿈"이라는 칼럼을 썼다. 정몽헌 회장이 세상을 떠난 것은 2003년 8월 4일의 일이다. 계동 사옥을 지날 때마다 정 회장을 떠올린다. 기자는 언제나 정 회장의 마지막 순간을, 낙하나 투신이 아닌 비행(飛行)이었다고 믿고 있다. 그는 생텍쥐페리처럼 마지막 비행에 나섰던 것이고 지금도 자유롭게 허공을 날고 있을 것이다.

동화작가 정채봉 선생은 그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시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하늘나라에 가 계시는/엄마가/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아니 아니 아니 아니/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단 5분/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원이 없겠다/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엄마와 눈맞춤을 하고/젖가슴을 만지고/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숨겨놓은 세상사 중/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엉엉 울겠다.'

정 회장도 가끔은 천국에서 휴가를 받아 우리 세상 나들이를 할 것이다. 그가 누구에게 뭘 일러바치고 싶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프로농구 시범경기가 9일 시작됐고, 정규리그는 19일에 개막하는데 휴가 나온 정 회장이 응원할 농구팀이 없어서 안타깝다. 현대 여자농구팀은 2004년 6월에 매각되어 신한은행 유니폼으로 바꿔 입었고, 남자농구팀은 2001년 5월 KCC로 넘어갔다.

허진석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