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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노 정부 햇볕정책 사실상 파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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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左)과 송민순 청와대 안보정책실장이 9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장 한편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안성식 기자

9일 북한의 핵실험 강행으로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해 온 대북 햇볕정책은 결국 조종(弔鐘)을 울리고 말았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이후 북한의 '벼랑 끝 전술'과 미.일의 강경책 사이에서 자주외교를 주창해 왔다. 한.미 동맹 못지않게 남북 공조를 강조하는 노선이다. 중국을 지렛대로 한 대북 설득에도 매달렸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대북 정책은 총체적인 실패였음이 드러났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핵 카드로 한반도 정세를 긴박한 대결 구도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한반도 정세를 관리하는 데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자주외교 구상은 물거품이 됐다"고 지적한다.

북한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해 제1차 한반도 핵위기를 초래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남북관계의 전면 중단과 국제 사회의 대북 제재에 가세했다. 그런 다음 북.미 간에 '제네바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북측이 핵실험 강행이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넘은 만큼 미.일이 주도하는 대북 제재의 강도.범위는 크고 넓을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고집할 경우 한반도 정세는 주변 4강의 손에서 요리될 가능성이 크다.

국내적으로도 햇볕정책을 지지해 온 세력은 크게 위축될 전망이다. 국내 여론이 대북 지원.협력 중단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노 대통령의 정책 실패 때문에 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은 심화할 수밖에 없다. 차기 대선 구도에서 '대북정책 실패 책임론'은 경제 문제와 함께 정권의 향방을 가를 최대 이슈가 될 가능성이 크다.

노 대통령의 정책 실패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우선 노 대통령과 주변 참모들의 북핵에 대한 안이한 상황 인식과 오판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몇 차례나 핵 카드를 꺼내들었을 때 우리 정부는 '실리를 확보하기 위한 전술'로 치부했다. 예컨대 지난해 2월 10일 북한의 핵보유 선언 이후 우리 정부는 ▶개성공단 사업의 차질 없는 추진 ▶대북 비료 지원 지속 ▶북핵 문제의 유엔 안보리 회부 반대를 밀어붙였다. 노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인도나 이란은 핵무기를 갖겠다는 거지만 북한은 핵으로 장사하겠다는 것 아니냐"(올 8월 언론사 논설위원과의 비공식 간담회에서)는 시각을 줄곧 유지했다.

노 대통령이 대북 설득의 구체적 정책수단을 확보치 못한 점도 손꼽힌다. 노무현 정부 들어 한.미 동맹을 바탕에 둔 한.미.일 공조체제는 약화됐다. 청와대는 7월 5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 당시 북한보다 일본을 비판하는 데 더 많은 신경을 썼다. 미국과는 대북 제재안을 두고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다. 햇볕정책을 주창했던 김대중(DJ) 전 대통령조차 "(포용정책을 위해선)미국을 잘 설득해야 한다"(9일, 경향신문 인터뷰)고 지적할 정도다. DJ정부에서 일했던 한 관계자는 "DJ는 밀사.특사 채널과 친북 국가들의 정상까지 활용했지만 노 대통령은 투명성을 내세워 물밑 채널 자체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이 기대했던 중국의 설득 역할도, DJ를 대북 특사로 파견하겠다는 복안도, 남북 정상회담 구상도 번번이 좌초됐다.

이양수 기자<yaslee@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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