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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으로 '밀리언 비즈니스' 일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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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스톤 국립공원으로 유명한 와이오밍은 미국 본토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주 가운데 하나다. 면적은 남한의 약 3배 가까운데 전체 주 인구는 한국의 중소도시에 불과한 50만명 가량이다.

북쪽으로 몬태나주가 바로 코 앞인 와이오밍의 최북단 셔리단(Sheridan)에 사는 김영기(53)씨 일가족은 그래서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희소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 김씨는 그러나 단순한 희소성을 넘어 하루가 다르게 셔리단의 유명인사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인구 약 1만6000명의 셔리단은 와이오밍에서 6번째로 큰 도시로 북부의 핵심도시다. 그가 최근 이 곳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개스 개발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서부터다.

"아는게 뭐 있었나요. 깨지면서 시작했지요. 이제 감이 좀 옵니다." 올 아메리칸 스타일의 레스토랑으로 기반을 잡은 김씨는 6년전 개스 개발사업에 뛰어 들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주류 인사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

고부가 가치라는 개스 개발사업의 특성때문에 사업 첫해부터 매출 규모로만 따진다면 곧바로 밀리언 비즈니스에 진입했다.

"한데 남는 게 없었어요. 굴착기 관리 사람 관리 모두 처음 해보는 것이었거든요. "

이런 식으론 백날 장사해도 손에 넣을 것 없겠다는 생각이 든 그는 때로는 밤을 세워가며 개스 굴착사업의 핵심을 파악해 나갔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순수입 규모로 진짜 밀리언 비즈니스로 키워냈다.

그가 소유한 대당 30만달러짜리 메탄 개스 굴착기는 3대. 셔리단 교외 야산 여기 저기에는 김씨의 회사 '영스 드릴링 캄퍼니'가 뚫은 메탄 개스전이 널려 있다. 개스 굴착사업은 시절만 좋으면 1년만 돌려도 기계값을 뽑고 남는다.

셔리단에 먼저 자리를 잡은 부모의 초청으로 80년 이 곳에 와 이민 둥지를 튼 그는 성실과 친화력을 무기로 와이오밍의 소도시를 '주름잡고' 있다. 그와 함께 시내를 돌아본 9월 초순 수퍼마켓이나 교외의 농장 음식점 어디를 가도 그는 인사를 주고 받기에 바빴다.

"셔리단 전체 주민들중에서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이 최소 절반은 될 겁니다. 또 제가 몰라도 저를 아는 분들도 많을 거예요."

김씨는 자원봉사와 사업을 통해 이 곳의 유명인이 됐다. 셔리단 YMCA에서 무보수로 15년 가량 태권도 사범을 한 것과 90년부터 운영해 온 음식점(킴스 패밀리 레스토랑)이 이 곳에서 인맥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굴착사업을 소개해 준 사람이나 그 후 개스 캄퍼니에 다리를 놔준 사람들도 다 이 곳 주민들이다. 그러나 김씨 특유의 '마초' 기질과 다정다감함을 빼놓고는 오늘날의 그를 설명할 수 없다.

50대 중반에 5척 단구인 그는 수년전까지만 해도 '까부는' 친구들은 손을 봤다. "요즘에는 그럴 일도 없지만 특히 이민 초기에는 체구 작은 동양인이라고 놀리는 일이 적지 않았어요. 그럴때마다 한번도 참지 않았어요. 수없이 붙었습니다."

김씨는 그러나 서부 특유의 분위기가 살아있어 싸움에 지건 이기건 경찰서에 간적은 한번도 없다고 했다. 싸움을 한 뒤 깨끗이 털어버리는 게 이 곳 사람들의 장점이라는 것. 육박전을 벌인 사람과는 싸움 뒤 더욱 친밀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주먹 싸움에서는 뒷걸음질 친 적이 없는 그 이지만 천성은 다정다감하다. 억센 액센트에 세련되지 않은 그의 영어는 장애물이 안됐다. 동네 사람들이 곧 그의 이런 천성을 알아봤다. 그가 친구가 많을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식당은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도 한다. 전통적인 서부 스타일의 미국 음식은 부인 명애씨가 식당을 열기전 미국 식당에서 일하면서 배워온 것인데 값이 싸면서도 음식 맛이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동네 사람들의 사교장이 되다시피 했다.

김씨는 새해 첫날과 크리스마스 연휴를 포함해 일년 내내 지금까지 16년 동안 식당 문을 한차례도 닫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하루 평균 4시간 정도 잠을 잔다는 그는 "최근 들어서는 나이탓인지 조금 피곤하다"며 5~6년만 열심히 하고 사업 규모를 좀 줄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맨손으로 와서 이 만큼 일궈 놨으니 만족합니다. 특히 아무 것도 해준게 없는 아이들이 잘 자라줘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 뿐입니다." 위로 딸 밑으로 아들을 둔 그는 애들이 그냥 저희들끼리 자라줬다고 몇차례씩이나 중얼거리듯 말했다.

김씨의 딸은 미시간에서 의과대학을 아들은 애리조나 주립대를 다니고 있다. 특히 아들은 골프를 늦게 배운데다 제대로 레슨도 못시켜 줬는데 와이오밍 주대회에서 3등을 차지하기도 했다며 연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한다.

김씨는 셔리단이 고향처럼 편하다고 한다. "제가 지금 어디가서 살겠습니까. 아버지는 2년전에 이 곳에서 돌아가셨어요. 어머니 아이 둘 우리 부부까지 우리 식구들 비석 모두 만들어 놨습니다. 죽는 날짜만 새겨 넣으면 돼요."

경기도 문산 출신으로 따로 이민온 뒤 고향 생각할 틈도 없이 바빴다는 그는 "중고등학교 친구들과 '쇠주'를 같이하는 낙이 없는 것이 미국생활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라고 말했다. 애주가인 그는 하드 리커 면허를 얻어 식당 한켠에 프라이빗 바를 만들어놓고 틈나는대로 위스키를 들이킬 정도로 술을 즐겨한다. 정신없이 살아온 이민 4반세기의 세월 술마시는 시간이 그에게는 유일한 휴식인 것처럼 보인다.

▶ 와이오밍주 셔리단은…경제적 활력 넘치는 소도시

셔리단은 와이오밍주 중앙 최북단에 자리잡은 도시. 북쪽으로 코앞이 몬태나와 주경계다.

셔리단의 한인은 김영기씨네 일가족이 전체다. 남동생과 여동생 가정 등 모두 3가구다. 김영기씨와 부인을 제외한 나머지 두 가족은 직장에 다닌다.

셔리단은 작지만 활력이 있는 도시다. 90 번과 25 번 주간 고속도로의 교차점이 바로 셔리단 남부에 있다.

김씨 가족에 따르면 적지 않은 미주 한인들이 여행길에 잠깐씩 셔리단을 들른다고 한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이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등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다.

셔리단은 미인을 많이 배출한 도시로도 유명하다. 올해 미스 와이오밍인 로빈 존슨이 이곳 출신이다. 91 년에도 미스 와이오밍 틴이 이 곳에서 나왔고, 그 이전 71 년 미스 와이오밍도 셔리단이 고향이다.

소도시 치고는 경제적 활력도 넘치는 편이다. 빈곤선 이하 인구가 10% 남짓이다. 북서부의 작은 도시 치고는 양호한 수준. 근처에 수두룩한 랜치와 전통적인 석탄산업 외에도 최근 메탄개스 개발이 활기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멀리 북쪽의 오지에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라틴계 인구가 급속히 느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라틴계 인구는 줄 잡아도 1000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되며,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다.

김영기씨는 “사람들이 순박하다. 도시 규모가 크지 않아 다양한 비즈니스가 들어서기는 곤란하지만, 열심히 하면 먹고 사는데는 문제가 없는 곳”이라고 말했다.

셔리단은 옐로스톤 자락이 있는 서쪽을 제외하곤 사방이 황량하기 짝이 없는 들판이다. 하지만 작은 분지에 자리잡은 셔리단에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어 도시 안에는 나무도 제법 많다. 이런 이유로 가끔씩 미국 전체 혹은 와이오밍에서 살기 좋은 도시에 선정되기도 하는 곳이다.
미주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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