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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ly리빙] 한가위 '마님과 삼돌이'가 본 한국의 추석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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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일각에서는 안사람과 나를 마님과 삼돌이라 부른다. 둘 다 전업작가로서 가사를 주로 내가 돌보는 것을 두고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그런 우리에게 추석을 어떤 방식으로 맞이하고 보내는지 써달라는 청탁이 들어왔다.

난감했다. 우리 부부는 추석은 물론 일체의 명절과는 무관하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어디 특별히 가는 곳도 없고, 차리는 음식도 없다. 형제도 있고 부모도 있지만 명절이라고 모이는 일은 없다. 어찌 보면 아주 냉정한 집안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합리적이라고 할까, 어머니 회갑연이나 조카 결혼식 등 뭔가 구체적인 이유가 없으면 모이지 않는다. 특히 도로가 주차장이 되는 명절 때는 더 그렇다. 가능하면 밖에도 안 나가고 집에만 있는다.

즉, 우리 집은 명절 스트레스가 원천적으로 없는 집이라는 것이다. 이런 우리에게 추석맞이 부부만담을 해달라니.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뭐라고 말하지? 그래도 혹시 몰라 우리집 마님인 진산에게 물어봤다.

좌백(左): 혹시 추석마다 모여 여자들은 전 부치고, 제사 준비하고, 남자들은 방에서 노닥거리는 그런 집안에 시집갔다면 어땠을 것 같소?

진산(右): 그 집 조상님들이 불쌍하지. 시커멓게 탄 전이나 부침개, 제멋대로 썰어놓은 김치, 삐뚤삐뚤 과일에 속 터진 송편 등등으로 차려진 제사상 받으면 저승에서도 얼마나 답답하겠소.

좌백: 그렇겠구려. 내려와서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맘 같아서야 '저년을 당장 내치거라'라고 하고 싶을 텐데.

시커멓게 탄 부침개라는 말에 기억이 났다. 진산도 명절 스트레스 비슷한 것을 경험한 일이 있다. 신혼 초, 그러니까 십여 년 전에 대구 큰형댁에서 한 번 가족들이 모인 일이 있었다.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가고 남자들은 거실에 앉아서 뭔가 진지한 얼굴로 사는 이야기를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때만 해도 진산은 (자기 생각엔) 착하고 순진해서 좋은 며느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환상이 있었다고 한다. 저 '대한민국의 불합리한 명절 풍경'에 대한 거부감에도 조금도 티를 안 내고 최선을 다해 부엌에서 여러 가지 '사고를 친' 것이다.

전을 부치라니까 한쪽은 검게, (접시에) 깍두기를 담으라니까 냉면 그릇에 잔뜩 담아놓고, 김치는 삼각.사각.오각형으로 제멋대로 썰어놓고, 설거지를 하라니까 바로 그릇 깨 먹고…. 결국 형수가 그랬단다. "자넨 저리 가서 그냥 앉아있게." '초장에 포기하게 만드는 게 인생 편하게 사는 법이야'라고 지금은 농담으로 넘겨버리지만, 우리 집이 명절 꼬박꼬박 챙기는 가풍이 아닌 게 정말 다행이다. 나야 진산이 요리를 잘하건 말건 상관하지 않지만 나를 제외한 가족은 안 그럴 수 있다. 나 말고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게 '가족으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의 첫 번째 규칙일 테니까.

그리고 그 가족 구성원 상당수는 우리 세대보다 오래 사신 분들이다. 나보다 오래 사신 분들이 어떤 일은 당연히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굳은 신념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렵고도 어렵다.

하지만 가족의 최소단위로서 부부는 가장 가까운 동지고 전우다. 그중 한 사람이 오랫동안 일방적으로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하는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일까? 조금씩이라도 고쳐나가는 게 옳은 것이 아닐까? 그러는 동안 적어도 남편만은 아내 편에 서서 감싸주고 싸워주는 게 옳은 일 아닐까.

좌백: 그래서 요즘은 주부들뿐 아니라 남편들도 명절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는 구려. 명절 끝나고 시작되는 아내의 바가지 때문에. 그걸 예상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남편들도 참 불쌍하지 않소.

진산: 명절 때 모이면 좋은 건 어린애들밖에 없는 것 같소. 학생은 공부 잘하는 친척 누구네 학생하고 비교되고, 처녀 총각은 시집 장가 안 가느냐고 한 소리 듣고, 또 결혼한 사람은 애 안 낳느냐고 시달리고. 평소엔 못 보고, 관심도 없던 가족들이 명절에 한 번 모인 자리에서 가족행세를 하려고 드니까 그렇게 뻔한 소리밖에 할 수 없는 거지.

좌백: 그래도 어르신들은 좋아하시잖아. 어르신들은 명절 끝나고 다 돌아가고 나면 그때부터 허탈감과 외로움에 시달리신다오. 그것도 일종의 명절 증후군이라 할 수 있을지도.

진산: 추석 아니라도 언제 어머니 한 번 뵈러 갑시다.

◆좌백과 진산=좌백(본명 장재훈.41)과 진산(우지연.38)은 무협소설 작가 부부다. 2002년 부인 진산이 쓴 '마님 되는 법'이 화제를 낳으며, 이들 부부의 삶은 한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대한민국 절반 이상의 가정이 여전히 지키고 있는 '살림=부인 몫'이라는 관념을 이들은 가볍게 뒤집었다. 살림에는 재주가 없다는 '마님'을 위해 국내 최고 무협작가이자 '마님의 삼돌이'인 좌백은 밥을 하고, 청소를 한다. 최근에는 좌백이 반기를 들고 부부 사이의 이야기를 '부부만담'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글=좌백,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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