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문화in] 2006 가을 秋史 바람…시서화·문사철 한 줄에 꿴 인문학의 대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근대화 100년간 우리는 분파된 서양학문에 매달렸다. 그 결과 원래 하나인 학문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어떤 원전도 맨눈으로 알 수 없게 됐다. 나와 세계에 대한 문답 보고인 퇴계.고봉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이나 추사체의 조형과 내용을 직독직해로 간파할 수 없는 것보다 더 큰 인문학의 불행이 있을까. 더욱이 예술품을 번역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오페라를 보는 대신 줄거리를 읽는 것과 마찬가지다.

18일 오후, 규장각 전신인 창덕궁 주합루. 추사 심포지엄에서 김봉준 실학축전 총감독이 "추사체야말로 중국도 만들어 내지 못한 동아시아 타이포그라피의 정수"라고 극찬을 했지만 합석했던 대학생 패널이 "그 훌륭한 추사의 언어와 문자를 하나도 모르겠다"고 고백한 지점에서 우리 학문의 심각성을 엿볼 수 있었다. 향후 100년이 걸릴지라도 추사를 원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재인가 노력파인가=추사는 인문학자의 초상이다. 반면 오늘날의 추사는 엄청난 작품 값에 따라 속물화되거나 인간으로선 이룰 수 없는 경지를 성취한 인물로 신격화된다. 하지만 속물화도 신격화도 추사의 뜻이 아니다. 추사는 천재이기 이전에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앤' 노력의 화신이다. 1만분의 9999분을 노력으로 도달했으며 나머지 1분조차도 사람의 노력 밖에서 구하지 않았다.

'추사체'의 기괴(奇怪).고졸(古拙)한 조형미는 바로 이런 연마의 결과다. 먹과 붓의 운용에서 글자의 점획.짜임새.배치까지 공간 전체의 조화를 이끌어냈다. 한국 현대조각의 거장 김종영은 자기의 예술이 추사의 조형세계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세잔과 추사를 비교하기도 했다.

추사체는 탈속(脫俗)의 정신세계와 직결된다. 추사는 글씨와 그림을 동시에 구사한 '불이선란도'에서 '난을 치지 않은 지 20년 만에 우연히 내 본성 안에 하늘을 그려냈다'라고 했다. 이런 '성중천(性中天)'의 경지는 내가 곧 부처임을 노래한 오도송이자, 유마의 '불이선(不二禪)'과 공자의 '유어예(遊於藝)'의 경지에 가깝다.

◆학예일치의 대 예술가=추사는 서예가 이전에 청대 고증학을 조선에서 꽃피운 경학(經學)의 대가이자 격조(格調) 높은 작품을 완성한 대시인이다. 청대 경학은 송명리학(宋明理學)의 주관적 학풍에 대한 반동에서 시작했다. 청대에는 각종 유교 경전의 문자를 바로잡기 위한 교감학이 성행하면서 고대 금석문이 새롭게 주목을 받았다. 학문이 곧 예술이었던 셈이다. 추사는 새로운 연구방법론으로 시작된 고증학을 그의 중국인 스승인 옹방강.완원으로부터 배워 조선에 도입하고 '진흥이비고' '무장사비잔자고' 등의 우리 금석문은 물론 '계첩고' '천축고' '실사구시설' '역서변' '태극즉북극변' 등 경전.불교 등의 고증학 분야에서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사실에 의거해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실사구시'의 실학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그래서 우리는 추사를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학예일치의 대예술가로 부른다.

◆19세기 동아시아를 평정=추사의 성취는 동시대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이룩하지 못한 경지다. 서예사는 한마디로 글씨의 전형을 세운 왕희지를 재해석하는 역사다. 당나라 안진경, 원나라 조맹부, 명나라 동기창 등 중국 명필의 토대는 모두 왕법(王法.왕희지체)이다. 통일신라시대 왕법이 한국에 건너온 이후 김생.탄연.안평대군.한석봉.이광사의 등 국내의 명필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러나 청대에 와서 왕법(王法)의 해석문제가 제기되면서 글씨의 근본을 왕희지 이전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이른바 비각(碑刻)을 연구하는 비학이 등장했다. 비학은 글씨와 경학이 둘이 아님을 강조한다.

청대의 학풍은 추사를 통해 결실을 맺는다. 당대 청에서도 뛰어난 서예가가 많았지만 추사처럼 비학의 학문성과와 서예의 예술세계를 아울렸던 작가는 없었다. 일각에선 아직도 추사를 청조문화의 수입한 작가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추사는 조선의 서예를 비판적으로 반성하고, 중국 비학의 성과를 받아들여 추사체라는 더 높은 경지에 올라섰다.

요컨대 추사는 오늘의 화두를 빌리자면 시서화.문사철.유불선을 한 줄에 꿴 진정한 인문학자다. 그래서 지금 추사인 것이다. 세상을 통합하는 인문학의 원형을 그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